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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상시화되는 문자폭탄,거꾸로 가는 청문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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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이낙연 총리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자유한국당 경대수 의원이 자기 아들의 병명이 ‘간질’이라고 공개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날 청문회에서 경 의원은 이 후보자가 아들 병역면제와 관련한 자료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았다고 추궁했는데, 그러자 경 의원 휴대폰엔 “당신 아들도 군대 안 갔으면서 왜 남보고 뭐라고 하냐”는 내용의 항의 문자가 쏟아졌다.

게다가 경 의원이 아들의 병역면제 사유를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SNS 등을 통해 급속히 퍼졌다.

이에 견디다 못한 경 의원은 이날 신상발언을 신청해 “제 아들의 병역면제는 뇌파의 병변으로 인한 경련성 질환, 흔히 말하는 간질 때문”이라며 “두 번의 신체검사를 받았고 객관적인 진료기록을 통해서 군 면제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경 의원은 “아들의 질환은 8살때 발병했는데 그로부터 10여년 동안 뇌파 검사를 포함한 진료를 반복해서 받아왔고 지금도 재발위험에 마음을 졸이고 있다”며 “이번 일로 충격을 받은 아들이 다시 또 재발증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아버지로서 참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경 의원은 “간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통상의 질병과 다르기 때문에 ‘특정질병으로 병역면제를 받은 경우엔 면제사유를 비공개할 수 있다’는 법 규정에 따라 관보에 자세한 질병명을 밝히지 않았다”고 했다.

‘문자 폭탄’을 받은 청문위원은 경 의원 뿐만이 아니다. 야당 청문위원 대다수가 수백통에서 수천통의 항의 문자를 받았다. 지난해 연말 탄핵정국때 ‘문자 폭탄’으로 곤욕을 치렀던 자유한국당의 한 의원은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막상 수백통씩 욕하는 문자를 만나게 되면 사람인 이상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 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문재인 정부에서 ‘문자 폭탄’은 상시적 현상이 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여권에선 이를 두둔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깨어있는 시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를 테러,폭탄으로 표현하고 정치쟁점화 하는 것은 국민과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라며 “국민을 혼내고 가르치려는 갑질적인 태도로는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라고 주장했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도 라디오에 출연해 문자폭탄에 대해 “자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참여가 자연스러워졌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 스스로도 민주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문자 폭탄’ 논란에 대해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러나 문자로 야당 청문위원들의 ‘허물’을 공격한다고 해서 총리 후보자의 도덕성이 자동적으로 검증되는 건 아니다.

무더기 문자의 목표가 비판자들의 입을 닫게 만드는 것이라면 확실히 효과적이다. 하지만 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할 때마다 휴대폰 번호를 바꿔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걸 ‘문자 민주주의’로 봐야 할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을 것 같다.

 국민을 대신해 공직 후보자를 검증해야할 의원들이 '문자 폭탄'에 시달리며 오히려 검증대에 서야하는 '거꾸로 가는 청문회'를 지켜본 소감이다.

김정하 기자 wormho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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