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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춤으로 50년 내전 상처 치유한 '몸의 학교' 설립자 레스트레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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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콜롬비아 현대 무용가 알바로 레스트레포가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오랜 내전으로 사회적 불안과 폭력, 빈곤, 마약 등의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콜롬비아 아동들을 위해 '몸의 학교'를 97년도에 설립했다.  김현동 기자

콜롬비아 현대 무용가 알바로 레스트레포가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오랜 내전으로 사회적 불안과 폭력, 빈곤, 마약 등의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콜롬비아 아동들을 위해 '몸의 학교'를 97년도에 설립했다. 김현동 기자

 예술교육은 사람들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만든다. 아름다움의 가치를 알고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전쟁으로 갈가리 찢긴 콜롬비아에는 더 많은 예술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타인과 호흡하면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가르친다."

 콜롬비아 예술대안교육기관인 ‘몸의 학교’(엘 콜레히오 델 쿠에르포·El Colegio Del Cuerpo)의 설립자이자 교장인 알바로 레스트레포(60·Alvaro Restrepo)는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몸의 학교는 전쟁 난민과 빈곤층 등 소외계층 청소년에게 무용을 가르치는 일종의 대안학교로 콜럼비아 정부와 국제기구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

레스트레포, 27세에 뉴욕에서 데뷔한 유명 현대무용가 #명성얻던 91년 돌연 귀국해 6년 준비 끝에 대안학교 설립 # #고국 콜롬비아 빈민가 어린이에게 현대 무용 교육 #20년간 8000여명 거쳐가...전문 무용수 500여명 배출 #베네수엘라 '엘 시스테마'와 함께 대표적 예술대안학교 #몸의 학교 무용단 구성해 전세계적으로 공연도 #"전 세계에 기회를 박탈당한 아동들 여전히 많아 # 이들을 위한 길에 한국과 많은 일 함께 하고파" #

 1997년 설립 후 20년 동안 8000여 명의 소외 계층 청소년들이 이 학교를 거쳐갔다. 그 중 약 500명은 전문 무용수로 성장했다. 그래서 베네수엘라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El Sistema)와 함께 소외계층을 위한 예술교육의 대표 사례로 꼽히고 있다.

  ‘2017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에 초청연사로 한국을 찾은 레스트레포를 23일 오후 서울 상암동에서 만났다. 이 행사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한다.

 레스트레포는 먼저 태블릿PC를 꺼내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허름한 녹색 반팔티를 입은 한 소녀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고 눈빛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연이어 보여준 몇 장의 사진 속엔 환한 얼굴로 춤을 추고 있는 그 소녀가 보였다. 소녀의 이름은 레시 베쓰(14·Lesi Beth)다. 소녀는 카르타헤나(Cartagena)의 빈민 지역 중 한 곳인 아로즈바르토(arrozbarto) 출신이다. 아로즈바르토는 콜롬비아어로 ‘싸구려 쌀’이라는 뜻이다.

 레스트레포는 “이 아이는 이제 무용수를 꿈꾸고 있다. 가난은 더 이상 이 아이를 옭아매지 못한다. 이렇게 기회(교육)만 주어진다면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다.

콜롬비아 몸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알바로 레스트레포.[사진 레스트레포]

콜롬비아 몸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알바로 레스트레포.[사진 레스트레포]

 몸의 학교가 세워진 97년은 콜롬비아 정부군과 무장혁명군(FARC)·민족해방군(ELN) 등 반군 사이 내전이 한창일 때였다. 64년 시작된 콜롬비아 내전은 지난해 정부와 최대 반군인 FARC가 평화협정을 맺으며 52년만에 그 마침표를 찍었다.

 내전의 상처는 컸다. 26만명이 숨지고, 6만여 명이 실종됐으며 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700만 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집을 잃고 떠도는 난민이 됐다. 레스트레포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내전의 최대 피해자는 힘 없는 아동들이었다. 콜롬비아 아이들은 내전과 폭력, 빈곤과 불평등 속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빼앗겼다. 내전 속에서 우리의 몸은 찢기고,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 인간의 몸은 유효 기간이 길지 않은 일회용품으로 전락했다.”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레스트레포는 27살이던 84년 미국 뉴욕에서 현대무용가로 데뷔했다. 90년대 초반까지 전 세계 40여 개국에서 공연을 펼치며 남미를 대표하는 무용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다 돌연 91년 콜롬비아로 돌아왔다. 그리곤 6년의 준비 끝에 프랑스 앙제 국립무용학교 교장을 지냈던 마리 프랑스 들뢰방(프랑스)과 함께 몸의 학교를 설립했다.

청년 레스트레포는 남미를 대표하는 현대무용가로 이름을 알렸다. [사진 레스트레포]

청년 레스트레포는남미를 대표하는 현대무용가로 이름을 알렸다. [사진 레스트레포]

무용가로 한창 전성기 때에 교육자의 길을 선택했다.
국가가 버린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 고향 콜롬비아의 비참한 상황은 예술가인 내 가슴 한 켠을 늘 무겁게 짓눌렀다. 난 예술은 사회를 향했을 때 비로소 본래의 의미를 찾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예술가와 교육자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한다는 점에서 통하는 면이 있다. 우리(예술 교육자)는 산파들이다. 예술가 산모들이 예술작품을 낳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전쟁으로 갈가리 찢긴 콜롬비아에는 더 많은 예술가가 필요하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난 무대에 설 때보다 더 예술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학교 이름이 ‘몸의 학교’다. 특별한 의미가 있나.
우리는 ‘인간의 몸을 다루는 새로운 윤리’를 교육 철학으로 삼고 있다. 내 몸을 스스로 통제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본능이고 권리이다. 몸은 감각의 원천이자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몸은 그것 자체로 아름답다. 하지만 콜롬비아의 아동들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분노와 좌절을 뼈 속까지 새겼다. 그들이 봤던 몸은 폭력의 몸이다. 하지만 춤을 추면서 우리는 내 몸에 대해 새롭게 인식을 하게 된다. 허공을 휘젓는 팔 동작이, 강렬한 시선이, 원을 그리는 다리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사람들의 감동을 끌어낸다. 보잘것없어 보이던 내 몸이 아름다움의 가치가 된다. 그것은 ‘나는 가치 있다’’나는 아름답다’는 존중의 회복이다.
단지 춤을 잘 추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 그 과정에서 배우는 가치가 더 중요하다. 내 몸에 대한 긍정과 존중은 내 삶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꿈을 찾고 삶을 개척해갈 수 있는 의지를 심어준다. 무리 지어 춤을 출 때는 나만 돋보여서는 소용 없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춤을 완성해가는 과정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전제로 한다. 앞뒤 간격을 조절하고 눈빛을 맞추면서 서로를 이해한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타인과 공감하고 함께 하는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예술교육은 곧 올바른 시민 양성과 맞닿아있다.
몸의 학교 학생들의 공연 모습. [사진 레스트레포]

몸의 학교 학생들의 공연 모습. [사진 레스트레포]

몸의 학교 출신 학생들의 공연 모습. 지난 20년 간 약 8000명의 학생이 몸의 학교에서 예술교육을 받았다. 이중 500여 명은 전문 무용수로 성장해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무용가가 됐다. [사진 레스트페로]

몸의 학교 출신 학생들의 공연 모습.지난 20년 간 약 8000명의 학생이 몸의 학교에서 예술교육을 받았다. 이중 500여 명은 전문 무용수로 성장해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무용가가 됐다. [사진 레스트페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뉴욕에서 만난 한국인 무용가 조규현은 내 정신적 스승이다. 그가 내게 교육자의 길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조규현은 내게 ‘(콜롬비아는) 춤으로 가득한 곳이야. 네가 배운 춤을 그곳에서 꽃피워보면 어떨까’라고 말했다. 난 그에게 한 개의 씨앗을 받았다. 그 씨앗이 자라 지금의 몸의 학교가 된 것이다. 그에게 배운 불교철학은 내 예술가적 감수성을 풍부히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

 레스트레포는 대안예술교육 관련 심포지엄과 워크숍 차 지금까지 한국을 10여 차례 방문했다. 이 학교 출신 무용수로 구성된 ‘몸의 학교 무용단’도 여러 차례 한국에서 공연을 했다. 지난해 말에는 한국 정부가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 추진한 문화예술교류사업 ‘아트 드림캠프’의 콜롬비아 파트너로 함께하기도 했다. 한국인 무용수들이 콜롬비아에서 그와 함께 소외계층 청소년 60명을 지도했다. 이 사업은 콜롬비아 외에 말라위·인도네시아·베트남에서도 진행됐다.

한국 정부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알리기 위해 진행한 세계문화교류사업인 '아트 드림캠프'에 레스트레포도 함께 참여했다. 콜림비아 현지에서 한국 무용수와 함께 빈민 아동을 가르쳤다. 그는 올해 2월 콜롬비아 학생들과 함께 한국을 찾아 공연을 했다. 사진은 당시 한국을 찾은 레스트레포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모습. [사진 레스트레포] 

한국 정부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알리기 위해 진행한 세계문화교류사업인 '아트 드림캠프'에 레스트레포도함께 참여했다. 콜림비아 현지에서 한국 무용수와 함께 빈민 아동을 가르쳤다. 그는 올해 2월콜롬비아 학생들과 함께 한국을 찾아 공연을 했다. 사진은 당시 한국을 찾은 레스트레포가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모습. [사진 레스트레포]

신체의 일부가 아프면 몸 전체가 고통을 느끼듯…지구 저편의 기아와 전쟁이 지구 이편의 우리와 결코 무관한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다.”

지난해 내전이 끝났다.
콜롬비아는 이제서야 평화를 정착시켜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 몸에 전쟁의 상처는 깊이 새겨져있다. 상처를 치유하는데 몇 세대의 시간이 더 걸릴 지 모른다. 아직도 빈부 격차는 심하고 교육의 기회는 넓지 않다. 몸의 학교의 교육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 세계를 둘러보면 기회를 박탈당한 아동들은 여전히 많다. 앞으로 국제적인 협력과 교류를 더 넓히려고 한다. 그 길에 한국과 많은 일을 함께 하고 싶다.  

글=정현진 기자, 사진=김현동 기자 Jeong.hyeon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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