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고 노무현과 대통령 문재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열흘 남짓 지났지만 벌써 몇 달은 된 것 같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장면의 연속이기 때문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광주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이다.

지도자의 역할 생각하게 한 #5·18 기념사의 뭉클한 감동 #국민통합에 큰 힘 발휘 #모두의 대통령 된 만큼 #오늘 노무현 추모식에서는 #말 없는 추모와 위로로 충분

지난주 5·18 묘역에서 거행된 기념식을 TV로 지켜보면서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생각했다. 국가 지도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대통령 기념사에 담긴 진혼(鎭魂)과 위무(慰撫), 화해와 통합의 메시지가 숙연하고 절절하게 다가왔다. 모처럼 지도자의 언어다운 울림과 품격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선 “그래, 이게 바로 나라야”라는 말이 나왔다.

유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지도자의 진심 어린 행동 앞에서 나는 감동의 눈물을 쏟고 말았다. 가슴을 후비는 음색으로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고 노래한 가수 전인권의 ‘상록수’ 열창과 모처럼 손에 손을 잡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는 장면에서는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국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고, 유족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다. 국가 지도자라면 한 맺힌 사람들과 함께 울고, 눈물 흘리며 그들의 원통함을 풀어줘야 한다. “완전한 진상 규명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정의의 문제”라는 문 대통령의 말대로 억울한 희생의 진실은 세월이 흘러도 끝까지 파헤쳐야 한다.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진실까지 다 드러나게 해야 한다. 해원(解寃)에는 시효가 없다. “그만하면 됐다”느니 “이제 지겹다”는 말은 가당치 않다. 돈이 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수백 명의 꽃다운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의 진상을 끝까지 파헤쳐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 지도자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제사장이 되고, 유족의 원한을 풀어주는 해결사가 될 때 국가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다. 외부의 위협 앞에서 똘똘 뭉쳐 나라를 지키는 자발적 애국심도 거기서 나온다. 국가가 만든 역사 교과서를 억지로 주입한다고 애국심은 절로 솟아나지 않는다. 이번 5·18 기념식은 수천, 수만 권의 국정 역사 교과서보다 훨씬 강력한 국민통합의 힘을 발휘했다고 믿는다.

오늘 문 대통령은 또 한 명의 원통한 넋을 달래러 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8주기 추모식 참석을 위해 그의 묘소가 있는 봉하마을을 찾는다.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감한 노 전 대통령도 문 대통령에게는 난폭한 국가 권력의 억울한 희생자일 것이다. 친구이자 동지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운명적이다. 노무현 없는 문재인은 생각할 수 없다. 노무현의 삶과 죽음이 있었기에 오늘의 문재인이 있다. 봉하마을을 찾는 문 대통령으로서는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선거운동 기간 중 자신이 당선되면 19대 대통령 자격으로 노 전 대통령의 8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로서는 약속을 지키는 셈이지만 고민도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자연인 문재인이 아니라 대통령 문재인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노무현을 그리워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노무현에게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번 한 번만 가고 말 것인지, 아니면 임기 동안 매번 갈 것인지도 고민스러울 것이다. 고인이 된 모든 대통령의 추모식 때마다 다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도 있을 수 있다. 추모식을 앞두고 하루 연차 휴가를 내 양산 사저에 머물다 상경하는 길에 봉하마을에 잠깐 들르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이런 고민의 산물일지 모른다.

문 대통령이 오늘 추모식에서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개인적 판단으로는 특별한 언급을 안 하는 게 좋다고 본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모식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고인의 영전에 추모의 염(念)을 표하고, 조용히 유족들의 손을 잡아 주는 걸로 족하다고 본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 그 자리에 참석하는 자체로 고인과 유족, 그리고 지금도 노무현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해원의 의미가 있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문 대통령은 자신이 쓴 『운명』이란 책에서 “노무현도, 참여정부도 하나의 역사가 된 만큼 그냥 있는 그대로 성공과 좌절의 타산지석으로 삼자”고 했다. “이제는 노무현 시대를 넘어서야 한다”고도 했다. 그렇다. 이제는 노무현을 놓아줄 때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시즌2’가 아니다. 그렇게 하라고 국민이 대통령으로 뽑아준 게 아니다. 적폐 청산이 잘못된 시스템의 청산이 아니라 또 다른 비극을 낳는 인적 청산이 된다면 지하의 노무현도 편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