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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은 했지만 운도 못 뗀 ‘최저임금 1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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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첫 노사 간 전운이 감돌고 있다. 최저임금을 둘러싸고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올해 최저임금은 시간당 6470원이다. 공약을 이행하려면 대폭 인상이 불가피하다. 어느 때보다 노사 간 격렬한 접전이 장기간 벌어질 수 있다.

내년분 데드라인 한 달 앞 #3년간 15%씩 올려야 가능 #노동계 기대는 높아졌는데 #최저임금위 가동도 못해 #1만원 땐 중기·자영업자 타격 #지역·업종 감안한 정책 필요

그런데 찻잔 속 태풍일까. 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가 아직 가동조차 안 되고 있다. 내년에 적용할 최저임금 결정 시한은 다음달 29일이다. 한 달여밖에 안 남았다. 지난달 1차 회의를 소집했으나 노동계가 집단으로 불참했다. 위원장도 선임되지 않아 공석인 상태다. 민주노총은 ‘단계적 1만원이 아니라 내년부터 단번에 1만원’을 주장하며 아예 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노총은 최임위 참여를 두고 실익을 따지며 주판을 두드리고 있다. 경영계도 대폭 인상 압박이 가해지는 마당에 굳이 협상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투다.

회의가 언제 열릴 지 가늠도 안 된다. 회의를 소집하려면 최소 2주 전에는 알려야 한다.

지금 소집 통보를 해도 6월 초는 돼야 첫 테이블이 마련된다는 뜻이다. 5월이 다 가도록 첫 회의조차 못 연 건 올해가 처음이다. 자칫하면 내년 최저임금을 정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마저 나온다. 현행 최저임금법에 따르면 대통령이나 고용노동부 장관은 임금 결정 권한이 없다.

이러다 보니 최임위 결렬 가능성에 대비해 아예 방향을 트는 방법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공익위원은 “대통령발(發) 특별법을 제정해 재임기간 동안 단계적으로 1만원까지 인상하는 내용과 함께 최저임금 결정 방식을 선진화하는 내용을 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사가 극적으로 호응해 최임위가 열려도 문제다. 경영계는 동결 또는 최소 인상을 주장한다. 노동계는 “1만원 관철”로 맞선다. 최저임금 인상은 문 대통령이 내세운 소득 주도 성장론의 핵심이다.

공약(3년 안에 1만원)을 실천하려면 연평균 15.7%씩 인상해야 한다. 2000년 이후 평균 인상률(8.6%)의 두 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최저임금 인상폭은 회원국 중 3위다.

한국의 최저임금은 5.8달러(2016년)로 OECD 27개 회원국 중 15번째다. 양극단에 있는 프랑스(11.2달러)와 멕시코(0.9달러)의 중간 수준이다. 그러나 파급효과는 다른 나라보다 크다. 최저임금 적용 대상 근로자 비율이 17.4%(2016년)에 달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6.2%)·영국(5.3%)·일본(7.4%) 등 한 자릿수 비율인 선진국과 차이가 크다.

더 걱정스러운 건 영세 자영업자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자영업자 중 51.8%는 연평균 매출이 4600만원에 못 미친다. 월평균 영업이익도 187만원(중소기업청)에 불과하다. 1만원을 월 단위로 환산하면 209만원이다. 고용주와 직원 간 소득의 역전이다. 실제로 지난해 최임위의 현장 방문 때 한 편의점 업주는 “1만원은 내가 노동자가 될 것인지, 사용자가 될 것인지의 변곡점”이라고 말했다.

특히 최저임금 적용 대상 근로자의 81.5%가 3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 근무한다. 지불 능력이 부족한 사업장이다. 오동윤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는 “중소·영세기업의 지급 능력을 끌어올릴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급격한 인상을 강행하는 건 부작용을 낳게 된다”고 지적했다.

최저임금이 빈곤 해결과는 관련이 없다는 연구도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낮은 임금을 받는 근로자 중 저소득(하위 20%) 가구에 속한 비율은 21.7%에 불과하다. 즉 저임금 근로자의 78.3%는 가구소득 3분위 이상으로 꽤 살 만한 사람들이란 의미다.

심지어 소득 상위 20% 가구에 속하는 사람도 10.7%나 된다. 윤희숙 KDI 선임연구위원은 “최저임금제가 빈곤을 완화하는 수단으로 인식돼 왔으나 노동시장과 가구 구조 변화에 따라 수정돼야 할 시점”이라며 “빈곤은 가구소득 기준으로 지원 대상을 선정하는 근로장려세제(EITC)나 사회안전망 확대를 통해 해결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OECD는 매년 정액으로 결정하는 최저임금 체계를 연령· 지역·업종별 특수성을 반영해 책정할 것을 권고한다. 최저임금의 분배 효과에 한계가 있고, 오히려 일자리가 줄어 청년 취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에서다. 박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당장 최저임금을 올리면 고용을 줄이거나, 폐업을 해야 할 업종과 그렇지 않은 업종을 구분해 접근해야 한다”며 “지역별로도 부동산 가격이나 생활비 격차가 큰 만큼 이를 반영해야 사용자의 부담을 덜어주면서도 근로자의 실질적인 소득 향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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