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법원 “페루서 난 국산차 사고, 국내 제조사가 6억 배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해외에 거주하면서 국산차를 구매해 타던 중 전복 사고를 당한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국내 제조사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첫 판결이 나왔다.

해외서 팔린 차 결함 책임 첫 인정 #5년 전 한국인 주재원 가족 사망·부상 #피해자 “차축 부러져 전복” 배상 청구 #쌍용차 “운전 과실” … 2년 넘게 소송전 #1심 법원, 페루 검찰 감정 근거로 결론

소송을 낸 A씨 등은 2012년 1월 22일 페루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A씨는 페루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은 형부를 따라 언니가 이주하게 되자 여동생과 함께 페루 이민을 준비 중이었다.

사고는 현지에서 4개월 전에 산 쌍용자동차 액티언 차량으로 페루의 판아메리카나 고속도로 카네테시 인근을 달리던 중에 발생했다. 태평양 연안을 따라 이어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차가 뒤집어졌다. 큰 소리가 나더니 왼쪽으로 틀어진 차량은 두 번을 굴렀다. 차량에는 A씨와 여동생(당시 38세), 언니, 언니의 딸(13세) 등 4명이 타고 있었다. 이 중 여동생과 조카가 현장에서 숨졌다. A씨 등도 목뼈가 부러지는 등의 부상을 입었다.

A씨는 딸을 잃은 언니 부부와 함께 한국의 쌍용차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국산차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 현지의 쌍용차 공식 판매대리점에서 샀는데 차량의 차축에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민사2부(재판장 김동현)는 이 소송 사건에 대해 지난 17일 “쌍용차는 6억4962만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고 21일 밝혔다.

A씨 측과 쌍용차 측은 2년4개월 동안 자동차 동력전달장치와 오른쪽 뒷바퀴를 연결하는 축을 놓고 공방을 벌였다. A씨 측은 ‘축이 부러져 차가 뒤집어졌다’고 주장했고 쌍용차 측은 ‘차가 뒤집어져 축이 부러졌다’고 운전자 과실을 의심했다. A씨 측은 사고가 난 해에 페루 국립공과대학 연구소에서 사고 원인을 분석한 감정 기술평가서를 근거로 제시했다. 평가서를 바탕으로 “오른쪽 뒷바퀴에는 특별한 손상이 없었고 도로에도 나머지 세 바퀴의 제동 흔적은 있지만 오른쪽 뒷바퀴의 흔적은 없었다. 이는 전복되기 전에 축이 끊어졌다는 근거다”고 주장했다. 한 목격자가 “갑자기 순간적으로 강렬한 소음이 나면서 차가 도로 중앙으로 돌진했다”고 한 진술도 제시했다.

재판부는 “이 사고는 쌍용차가 제조한 자동차의 축의 결함으로 인해 발생했다”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쌍용차는 제조사로서 사고로 입은 손해에 대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의무를 부담한다”고 밝혔다. 사고 원인에 반박하는 쌍용차의 주장에 대해서는 “제조물에 결함이 있는지 없는지가 불분명한 경우에는 소비자가 사고 당시 상태를 증명해야 하지만 이 사고는 자동차 결함으로 발생했음이 밝혀졌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딸을 잃은 언니 부부에게 상속분·장례비·위자료 등으로 4억6442만원, A씨에게 치료비·간병비·노동 능력에 대한 위자료 등으로 1억8520만원 등 총 6억4962만원을 배상금액으로 책정했다.

쌍용차 측은 “원고가 사고 당시 발생한 다른 피해자에 대한 형사 처벌을 면하기 위해 의뢰한 감정만을 가지고 결함이 인정됐다”며 항소 의사를 밝혔다. 또 “문제가 된 차축 등 부품이 페루의 대학에서 제대로 보전되지 않는 등 증거 훼손 행위가 의심된다. 설령 차축에 문제가 있다 해도 축을 만든 것은 쌍용차가 아닌 다른 부품 제조회사다”며 “배상 책임이 확정된다면 구상금을 청구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원고 측 소송을 대리한 진종한 변호사는 “제조물책임법(PL·Product Liability)이 시행되면서 소비자가 입증해야 할 책임이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법원에서 제조사의 책임을 잘 인정하지 않는 편”이라며 “이 사건은 페루 현지에서 검찰의 특수 감정까지 거쳐 운전자의 과실이 아닌 차축의 결함이 인정된 사건인데도 2년 넘게 걸렸다”고 말했다.

제조물책임법은 제조물의 결함으로 발생한 손해에 대한 제조업자 등의 손해배상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 등 복잡한 기술이 적용된 제품의 결함을 제조사를 상대로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매년 교통안전공단에 80여 건이 신고되는 급발진 사고의 경우 제조물책임이 인정된 확정 판결은 지금까지 한 건도 없다.

페루 쌍용차 사건 일지


2011년 9월 A씨, 페루의 쌍용차 공식 판매대리점에서 2011년형 액티언 자동차 구입
2012년 1월 페루 카네테 지역에서 A씨가 운전한 차량 전복돼 동생, 언니의 딸 사망
 10월 페루 국립공과대 “결함 있는 차축이 부러져 사고 발생” 감정평가서 작성
 11월 페루 검찰, 차량 결함에 의한 사고로 판단해 A씨의 운전 과실 무혐의 처분
2015년 1월 A씨와 언니 B씨 부부, 수원지법 평택지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 접수
2017년 5월 심 재판부 “쌍용차는 A씨와 B씨 부부에게 6억5000만원 배상하라” 판결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