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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같은 공기업, 바람 불자 먼저 누웠다...새 정부 기조 맞춰

중앙일보

입력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미세먼지 감축 대책으로 다음달부터 국내 최대 규모의 석탄화력발전소인 보령석탄화력발전소를 비롯해 국내 30년 이상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8곳을 일시 가동중단을 지시했다. 이에따라 충남지역 석탄화력발전소의 가동중단 대상은 보령화력 1호기, 2호기와 서천화력 1호기, 2호기 등 4기다. 사진은 16일 오후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오포리에 위치한 보령석탄화력발전소 모습.김성태/2017.0516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미세먼지 감축 대책으로 다음달부터 국내 최대 규모의 석탄화력발전소인 보령석탄화력발전소를 비롯해 국내 30년 이상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8곳을 일시 가동중단을 지시했다. 이에따라 충남지역 석탄화력발전소의 가동중단 대상은 보령화력 1호기, 2호기와 서천화력 1호기, 2호기 등 4기다. 사진은 16일 오후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오포리에 위치한 보령석탄화력발전소 모습.김성태/2017.0516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이번에도 먼저 누웠다. 공공기관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각종 새 정부 정책들이 속속 추진되면서 공기업 등 공공기관들이 ‘솔선수범’하기 시작했다.

한국전력 미세먼지 50% 감축, 마사회 일자리 TF 신설 #문재인 대통령 정책 발표에 긴급회의 열고 곧바로 화답 #성과연봉제 폐기 위기 등 공공기관 정책도 ‘정권교체’ 눈앞 #돈줄, 목줄 쥔 새 정부 정책에 협조 않을 재간 없어 #“정권교체 관계없이 영속 가능한 정책 시행했으면...”

한국전력과 5개 발전 자회사들은 향후 5년간 석탄 화력 미세먼지를 50% 감축하기로 결의했다. 이를 위해 향후 5년간 7조5000억원을 투자해 환경설비를 개선하고 미세먼지 측정소를 대폭 확충하기로 했다. 지난 19일 한국전력과 5개 자회사 등 11개 계열사 사장들이 급하게 모여 회의를 열고 내린 결론이다.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노후 석탄 화력발전소 8기의 가동중단 등 미세먼지 저감 대책을 발표하면서 의지를 피력하자 재빨리 화답한 모양새다.

한국전력이 내놓은 감축 목표치 50%는 문 대통령의 공약사항이었던 ‘임기 내 석탄 화력 발전량 30% 감축’보다 더 높아진 수치다.  전력그룹사 전 직원의 차량 2부제 의무화 등이 포함되는 등 고민의 흔적도 역력하다.

문재인대통령,인천공항 비정규직 노조 방문12일 오전 문재인대통령이 인천공항공사 4층 CIP 라운지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 참석해 참석자들과 대화하고 있다.2017.5.12.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대통령,인천공항 비정규직 노조 방문12일 오전 문재인대통령이 인천공항공사 4층 CIP 라운지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 참석해 참석자들과 대화하고 있다.2017.5.12.청와대사진기자단

한국마사회도 비정규직과 간접고용 인력의 정규직 전환을 위해 ‘상생 일자리 태스크포스(TF)’를 신설했다. 역시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창출 및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에 발맞추기 위한 조치라는 게 마사회의 설명이다. 이양호 한국마사회장은 “공공기관 정책이 경영 효율화에서 공공성 강화로 무게중심이 옮겨지는 추세에 발맞춘 것”이라며 “전담조직을 통해 새 정부의 정책 기조에 적극적으로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TF를 직접 이끌 예정이며, 부회장이 총괄 TF 팀장을 맡는다. TF는 비정규직 및 간접고용 인력의 정규직 전환 대책 마련을 위해 심층 실태조사에 착수했다.

문 대통령이 지난 12일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천명한 이후 인천공항공사 이외의 공공기관에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내놓은 건 마사회가 처음이다. 마사회가 처음 총대를 맨 건 다른 공공기관에 비해 비정규직(간접고용 포함)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1분기 현재 한국마사회에는 비정규직 2237명(시간제 근로자 2114명 포함), 간접고용인력 1575명이 근무하고 있다. 정규직(880명)에 비해 비정규직의 숫자가 월등히 많다.

한국전력도 ‘전력그룹사 좋은 일자리협의회’를 사장단 회의 개최시 함께 운영하기로 했다. 한국전력은 간접고용 인력이 7715명으로 전체 공공기관 중 가장 많다. 이들 공기업이 총대를 맨 만큼 다른 공공기관들도 속속 ‘새 정부 정책에 대한 전면 협조’ 방안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공기관들이 새 정권의 정책에 적극 호응하고 나서는 건 일단 공공기관들이 공적인 기관이기 때문이다. 공기업·준정부기관 등 공적인 영역에 종사하는 만큼 새 정권 정책에 호응하고 나서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측면도 있다. 공공기관의 돈줄과 공공기관장의 목줄을 정부가 쥐고 있는 상황이라서다. 공공기관들은 기획재정부로부터 매년 경영실적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성과급을 더 많이 지급받게 되고 이듬해 예산도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나쁜 평가를 받으면 성과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평가 기준에는 실적이 상당 부분 차지하지만 정성적인 평가 요인들도 적지 않아 공공기관으로서는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기관장들은 더욱 더 민감하게 권력의 향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엄연히 임기가 정해져 있지만 정권교체시 전리품처럼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새 권력자들을 당해낼 도리가 없어서다. 조금이라도 더 자리를 보전받으려면 새 정부의 시책에 적극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정부 각 부처 산하 332개 공공기관에서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기관장은 218명으로 전체의 65.7%를 차지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권이 바뀌면 공공기관의 역점 추진사업도 ‘정권교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당장 박근혜 정부가 중점 추진했던 성과연봉제는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공무원노조총연맹 출범식에서 “공공부문 성과연봉제와 성과평가제를 즉각 폐지하겠다”고 밝히면서 이 제도의 생존이 쉽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당장 기획재정부도 올해 말 공공기관 경영평가 기준에서 성과연봉제 관련 가점을 삭제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익명을 요구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공공기관으로서 새 정부 정책에 부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아서 ‘입안의 혀’처럼 처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씁쓸할 때도 있다”며 “새 정부가 공기업의 정체성을 좀 더 명확하게 정립해주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영속할 수 있는 좋은 정책들을 많이 만들어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세종= 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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