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6자회담' 특별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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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리처드 닉슨과 제럴드 포드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역임한 헨리 키신저 박사는 오는 27~29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릴 6자회담을 앞두고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한국은 워싱턴과의 긴밀한 정책협의를 통해 공동의 대북 협상전략을 추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북한이 6자회담을 수용했다. 이에 따라 대량살상무기가 위험한 정권의 손에서 축적되는 위협이 제거될 수 있게 됐다. 특히 6자회담은 개혁과정에 있는 북한을 국제사회에 끌어넣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아울러 주요 주변국들이 힘을 합해 북한에 압력을 가해야 할 이유도 찾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은 핵심적이다. 중국은 북한의 동맹국인 동시에 주요 교역국이다.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역사적 배경도 비슷하다. 베이징 당국은 북한의 핵무장이 곧 일본의 핵개발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 지금처럼 미묘한 시점에서 북핵 문제로 인한 한반도 위기상황이 지속될 경우 중국 당국이 추진 중인 개혁정책과 현 정권의 정치기반 확립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도 잘 이해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들어 가장 평화적인 세대교체를 실현했다. 국가주석과 총리는 물론 전체 24명의 정치국원 중 16명이 바뀌었고, 상무위원은 한 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교체됐다. 성장(省長)은 전체의 3분의 1이 바뀌었다.

여기에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上海) 엑스포를 치러야 한다. 중국 국경에서 벌어지는 전략적 불확실성과 위기가 지속되는 게 반가울 리 없다. 지난 수십년의 혼란을 극복하고 얻어낸 국가적 통합과 개혁의 상징물인 베이징 올림픽.엑스포 등의 대형 프로젝트는 물론이고 미.중 관계마저 위태롭게 할 소지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줄곧 표명해왔다. 중국은 지난 4월 베이징에서 열린 3자회담에 이어 이번 6자회담에서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평양의 정치적 붕괴를 피하면서 북한의 핵개발을 중단시키겠다는 입장이다. 최소한 중국은 북한의 정치 전개를 통제할 수 있는 영향력을 확보하려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북핵 문제를 놓고 중국과 협력하는 것은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의 입장 조율에도 큰 도움을 준다. 교착상태에 빠진 북핵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대북 압박의 구축에는 한국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한국만큼 북한 핵무기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나라도 없다.

그리고 북한의 목표 역시 한국을 동맹국들과 이간(離間)시키고 한국 정권을 궤멸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전후 세대들은 한국이 한국전 당시 미국의 도움을 받아 공산군을 물리쳤으며 미국의 지원아래 민주주의와 산업국가로 도약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1960년대 유럽을 휩쓴 급진주의와 맹목적인 민족주의 세례를 받은 한국의 전후 세대들은 전통적인 한.미 관계를 뜯어고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북한정권을 포용함으로써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소위 햇볕정책의 토양이 됐다.

한국은 북한에 대한 방위를 미군에 의지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북한과 미국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비무장지대(DMZ) 일대에 배치된 1만여문의 야포가 자신들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만큼 북한 핵무기가 위협을 특별히 더 가중시키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정부의 주요 인사를 포함해 많은 한국 사람은 북한 핵에 대한 미국의 우려에 공감하면서도 외교가 실패할 때 무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미국의 정책에는 지지를 꺼린다. 게다가 일부 한국인은 북한의 핵개발에 민족적 자긍심마저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미.일.중.러 등 주변국들이 북한핵 정책과 관련해 의견 일치를 보인다면 한국도 이들의 정책에 도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들의 운명을 북한에 맡기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이 국제사회를 겨냥해 '보복공격' 등 강성발언을 거듭하는 것은 단지 김정일 정권의 고립과 상황 악화만을 초래할 뿐이다. 북한의 목적은 안보 분야에서 민족의 대변자를 자처하며 미국을 잠재적 침략자로 규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북한의 그런 전략은 오히려 압력의 방향을 북한으로 향하게 하는 외교적 움직임을 낳았다. 북한은 그 격렬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군사적 선택지가 없다.

서울을 폭격하겠다는 얘기는 원하는 정치적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며 결국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북한이 갖고 있는 최대의 협상 카드는 사실상 그 자신의 붕괴며 이는 그 속성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리=박소영.윤혜신 기자oliv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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