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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0, 과속하면 탈나 … 노동계에도 양보 요구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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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장원석 기자 중앙일보 기자

새 정부에 바란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한 이후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현장에선 정규직 전환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우리도 해달라’는 요구다. 서울대 비학생 조교가 무기 계약직 전환을 요구하는 총파업에 들어갔고, 환경미화원과 집배원들도 성명을 냈다. 공공기관 역시 바빠졌다. 기획재정부는 조세재정연구원에 공공기관의 간접고용 실태 조사를 의뢰했다. 이 결과에 따라 하반기 중 비정규직 전환 로드맵을 발표할 예정이다. 17일엔 간접고용이 많은 10개 공기업을 소집해 대책회의를 열기도 했다.

리셋 코리아 고용노동분과의 제안 #정규직 노조 기득권 내려놓는게 관건 #노사정 한 발씩 물러나 머리 맞대야 #무기계약직·기간제는 정규직 전환 #파견직, 자회사 정규직화가 현실적

중앙일보·JTBC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 ‘리셋 코리아’의 고용노동분과 위원들은 ‘비정규직 축소’라는 문 대통령의 정책 방향에 대체로 공감했다. 단 “옳은 길로 가도 과속하면 탈이 난다”는 지적과 함께였다.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비정규직 을 차츰 줄여가되 기관별 업무 특성과 환경을 정확히 반영해 꼼꼼하게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며 “근로자들도 정부가 방침을 밝혔으니 세부안이 나올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공공기관뿐 아니라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체계적인 정규직 전환 청사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일자리 창출과 함께 문 대통령의 고용노동 분야 핵심 공약이다.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선언은 했지만 난관이 많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공공기관 비정규직은 직접 고용이 3만6499명, 파견·용역 등 간접 고용이 8만2264명으로 모두 11만8763명이다. 정규직이 약 28만 명인 것과 비교할 때 적지 않은 숫자다. 공공기관(공기업 포함) 정규직(무기 계약직 포함)의 인건비는 예산으로 지급한다. 정규직 전환으로 늘어나는 인건비만큼 정부 부담도 커진다.

돈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기관별·직무별로 비정규직의 업무 성격이 제각각이라 일률적 전환 방안 마련이 쉽지 않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온전한’ 전환을 강조한다. 사내 정규직 신분으로 바꿔달라는 요구다. 현실적 장애물이 적지 않다. 특히 파견 근로자 전환이 논란거리다. 파견 근로자의 정년 문제, 일부만 대상으로 할 경우의 차별 우려, 기존 인력 공급 업체의 생존 문제 등이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존 무기 계약직이나 기간제는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파견 등은 자회사 정규직 형태로 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문재인표 고용 정책은 ‘늘·줄·높’으로 요약된다. ‘일자리는 늘리고, 근로시간과 비정규직은 줄이며, 고용의 질은 높이겠다’는 내용이다. 일자리는 문 대통령이 내세운 ‘사람 중심 성장 경제’의 출발점이다. 소득을 늘리고, 이게 소비 확대로 이어지면서 생산 증가로 연결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분과장인 주완 김앤장 변호사는 “일자리와 소득 중심으로 성장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는 계승·발전을”

근로시간 단축은 ‘디테일을 다듬으라’는 조언이 나왔다. 문 대통령은 실질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로 일자리 50만 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근로시간 단축이 반드시 고용 증가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박가열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위원은 “중소기업 근로자나 시간당 임금을 받는 근로자의 수입 감소(수당 감소)를 야기할 수 있는 만큼 이들의 생활을 어떻게 보장할지에 대한 대책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일자리 나누기의 모델로 ‘광주형 일자리’를 꼽았다. 노·사·민·정이 대타협을 통해 연봉 4000만원대의 적정 임금을 받는 안정적 일자리를 늘리자는 것이다. 독일 볼프스부르크나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에선 성공했다. 한국에 제대로 이식하려면 노사정이 한 발씩 물러나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주완 분과장은 “특히 정규직 노조가 기득권을 내려놓는 게 관건”이라며 “필요하다면 대통령이 직접 나서 노동계의 양보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하는 문화를 개혁해야 근로시간 단축이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는 지난 정부 고용정책 중 그나마 호평받은 것”이라며 “꼬리표라 생각하지 말고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연 근로시간이 1500시간 미만으로 짧은 편인 독일·네덜란드는 한국에 비해 파트타임 비중이 2~3배 높고,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도 15%포인트가량 높다. 권혁 교수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오전 9시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걸 당연시하는 관행을 바꿔야 일하고 싶은 여성에게 기회가 돌아간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을 고용할 때 특정한 조건에 부합할 때만 허용하는 사용사유 제한은 속도조절론에 힘이 실렸다. 산업 현실을 면밀히 살핀 뒤 도입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70~80년대 사용사유 제한을 도입했던 유럽 국가들은 경기 변동에 따른 대처능력이 떨어져 기업이 위기에 빠진 후 제도를 없앴다”며 “근로자의 처우를 개선하고 노동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시장의 수요·공급 원칙을 훼손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일자리를 늘리려면 결국 민간이 움직여야 하는데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완화해줄 규제 완화가 동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일자리위원회, 합리적 대안 찾을 것 기대”

민간 기업을 대상으로 한 청년의무고용할당제는 특정 연령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헌법 위배(연령차별) 논란이 있다. 기업임금분포공시제도는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공정한 근로여건을 조성한다는 취지지만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 사이에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위원들은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설치에 대해 기대감을 나타냈다. 일자리위는 대통령이 직접 위원장을 맡는다. 부위원장에 경제부총리 후보로 거론되던 이용섭 전 의원을 임명하면서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다. 김영기 대한산업안전협회 회장은 “노동계(비정규직 포함)와 경영계 대표와 전문가가 참석하고, 대통령이 직접 신경을 쓰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에 노사정이 지혜를 모아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장원석 기자
이영민(이화여대 언론정보학4) 인턴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