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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처럼 살지 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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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딸이 엄마가 됐을 때, 나는 엄마처럼 살 수 있을까. [중앙포토]

딸이 엄마가 됐을 때, 나는 엄마처럼 살 수 있을까. [중앙포토]

이경희국제부 차장

이경희국제부 차장

5월 첫 주는 고비였다. 직장은 퐁당퐁당 쉬는데 학교와 유치원은 재량휴업으로 일주일 내내 쉬었다. 휴업일 두 딸을 맞벌이 자녀를 위한 돌봄교실에 보내놓고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막내는 손가락을 부러뜨려 깁스를 한 상태였고 미세먼지에 건조한 날씨 탓인지 매일 코피를 쏟고 있었다.

석가탄신일이던 3일 철야를 해 4일은 쉬는 날이었다. 막내의 코피 때문에 아침 일찍 깬 김에 “오늘은 학교랑 유치원 가지 말고 엄마랑 같이 놀래?”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친정 엄마가 “학교를 빠져 버릇하면 안 된다”며 정색하셨다. 초·중·고 12년을 개근한 나는, 어린이집부터 유치원·초등학교까지 만 1세도 되기 전부터 지금까지 거의 평생 개근한 딸들의 인생이 갑자기 가여워졌다.

“다른 애들은 일주일 내내 쉬는데 하루 빠지는 게 뭐 어때서. 이렇게 살면 나처럼 돼….” 내 한마디에 엄마의 거센 반격이 돌아왔다. “너처럼 사는 게 뭐 어때서! 나처럼 살지 말라고 널 이렇게 키웠는데!”

때아닌 분란에 눈치를 보던 큰아이는 잽싸게 학교에 가버렸다. 철없는 막내는 느긋하게 놀며 쉬며 아침밥을 먹더니 “이제 유치원 갈래”라고 말했다. 재차 물었지만 답은 같았다. 엄마 말고 유치원을 택한 딸에게 약간 배신감을 느꼈지만 유치원이 즐거운 모양이구나 싶어 안심이 됐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아이를 등원시키고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눈을 뜨니 오후 3시였다. 수면빚을 갚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유치원에 제 발로 간 딸이 과연 효녀였다. 아이 입장에서도 피곤한 엄마보다는 유치원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게다. 사실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내가 아이를 보던 중 벌어진 사고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모든 엄마가 육아 전문가는 아니니까.

밥 먹고 한숨 돌리니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 피 같은 휴일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딸은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돌봄 노동을 떠안은 친정 엄마의 하루하루는 더 허무하게 지나갈 것이다. 세상 모든 엄마는 딸에게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하는 법이다. 나도 어릴 땐 엄마처럼 살지 않으리라 야무지게 다짐했다. 하지만 엄마 덕에 경력을 이어온 나는 이제 묻는다. 우리 딸들이 엄마가 됐을 때, 나는 엄마처럼 살 수 있을까.

대통령 딸 문다혜씨가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됐을 때 “사회에서 도태될 것이 두렵다”고 푸념하자 ‘아버지’ 문재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직업은 ‘엄마’다. 가장 중요하고 큰일을 하는 네가 자랑스럽다”며 격려했다고 한다. ‘대통령’ 문재인은 ‘엄마’의 자리에 조부모·보육교사부터 아빠까지 모든 위대한 돌봄 노동자들을 넣어주길 기대한다. 엄마들이 딸에게 ‘엄마처럼 살아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도록.

이경희 국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