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1년에 열흘 안팎 교육·행사장으로 전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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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적은 지역의 공연장은 공연장이라기보다 각종 단체의 교육장이나 회의장 역할을 하고 있다. 10일 오후 강원도 화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화천신협 정기총회에 조합원들이 입장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화천=이찬호 기자

10일 오후 2시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화천문화예술회관. 300여 명의 주민이 대공연장으로 속속 들어갔다. 일부는 기념품인 우산만 받고 발길을 되돌렸다. 공연장에서는 화천신용협동조합 조합원 정기총회가 열렸다. 이에 앞서 8, 9일에는 소공연장(200석)에서 농촌조사원 조사교육과 지난달 중순 화천군 농업기술센터가 주관하는 영농교육이 열렸다.

지난해 이 문예회관에서 열린 공연은 11일. 그나마 보육원생을 위한 무료 연극 등 공연 9건과 영화 '말아톤' 상영이 전부다. 반면 민방위교육.간병인교육.위생교육 등 지방자치단체 등이 주관하는 교육이 31건 개최됐고, 산불예방 궐기대회와 여자 축구 창단식 등 각종 행사가 59건 열렸다.

지역 주민들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막대한 세금으로 건립한 문예회관(공연장)이 본래의 취지와 동떨어지게 운영되고 있다. 외형만 크고 번듯할 뿐 제대로 콘텐트를 채우지 못하면서 집회시설로 전락하고 있다.

◆ 너도 나도 짓는다=공연장 이외에 전시실.강의실 등이 포함된 문예회관 한 개를 건립하는 데 300억원 안팎이 필요하지만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현재 전국의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연장은 140곳이며, 30곳이 건립 중이다.

인구 3만 명의 경북 청송군은 2008년 12월 완공 예정으로 1000석 규모(대공연장 700석, 소공연장 300석)의 문예회관을 짓기 위해 현재 후보지 선정 작업이 한창이다.

공사 비용은 150억원으로 이 중 국비 20억원, 도비 10억원이고 나머지 120억원은 군비로 모두 세금에서 조달한다. 강원도 인제군(인구 3만2000명)은 888석짜리, 충남 청양군(인구 3만8000명)은 1000석 규모의 공연장을 짓고 있다.

경북도청 문화예술산업과 관계자는 "인구 8만 명인 문경시의 공연장(864석) 가동률이 40%, 인구 12만 명인 영주시의 시민회관(613석)의 가동률은 51%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청송군의 문예회관은 지나치게 큰 편"이라고 말했다. 가동률은 수리.보수.점검에 필요한 기간을 빼고 공연이 가능한 날짜 가운데 실제 공연이 열리는 날짜의 비율을 말한다.

이에 대해 청송군 관계자는 "인구가 적다고 안 짓거나 작게 지으면 인구가 자꾸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진다"며 "문화 기반시설이 전무한 농촌지역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 뚜렷한 운영 계획도 없어=정부는 '1지자체, 1문예회관' 원칙에 따라 예산과 부지를 확보한 지자체에 공사비로 20억원씩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단체장들은 운영방법과 예산 확보 방안도 없이 일단 지어놓고 보자는 식이다. 대구 동구문화체육회관의 경우 지난해 운영비 11억원 중 공연 기획예산은 1700만원에 불과하다. 작품성 있는 공연을 한 차례 열 수 있는 예산이다.

경남포럼 권순주 회장은 "단체장들이 업적 홍보용으로 지나치게 규모가 큰 문예회관을 짓고 있다"며 "유지비가 많이 드는 대규모 시설보다 소규모 공연장을 지어 주민들이 자주 찾을 수 있도록 하고 대규모 공연장은 인근 지자체끼리 공동으로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 정부 대책은=정부는 지자체가 공연 프로그램을 마련할 경우 공연비 일부를 지원할 계획이다. 문화관광부 기초예술진흥과 강대금 사무관은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재정자립도가 20% 이상인 곳은 기획 공연 예산의 60%를 정부가 지원하고, 자립도가 20% 미만인 곳은 80%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또 지자체 공연장 가운데 무대가 너무 좁거나 출연자 대기실이 없는 등 시설 기준에 미치지 못해 공연자들이 지방 공연을 기피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올해 안에 '공연장 건립 매뉴얼'을 제작해 보급하기로 했다.

이찬호.홍권삼.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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