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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홍 해임 후 ‘김정남 피살’ 주도한 이정록이 이끌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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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호 15면

북한판 국정원, 국가보위성에 무슨 일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3년 11월 4·25문화회관에서 20년 만에 열린 제2차 조선인민군 보위일꾼대회에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와 총정치국 관계자들과 함께 참석했다. 앞줄 왼쪽부터 염철성 총정치국 선전부국장,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최용해 총정치국장, 김정은, 조경철 보위사령관, 김수길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황병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당시 직책). [노동신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3년 11월 4·25문화회관에서 20년 만에 열린 제2차 조선인민군 보위일꾼대회에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와 총정치국 관계자들과 함께 참석했다. 앞줄 왼쪽부터 염철성 총정치국 선전부국장,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최용해 총정치국장, 김정은, 조경철 보위사령관, 김수길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황병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당시 직책). [노동신문]

김원홍이 지난달 15일 김일성 생일 105주년을 맞아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김정은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김원홍이 지난달 15일 김일성 생일 105주년을 맞아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김정은에게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한때 가택연금설이 나돌았던 김원홍 전 북한 국가보위상(한국의 국가정보원장)이 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담당 제1부국장으로 복귀했다고 북한 사정에 정통한 정부 관계자가 전했다. 이 관계자는 6일 “김원홍이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바로 밑에 신설된 조직담당 제1부국장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김원홍은 지난 1월 문책성 계급 강등조치를 당한 뒤 가택연금설까지 나왔다. 하지만 석 달 만인 지난달 15일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일성 생일 105주년을 맞아 열린 열병식에서다. 대장(별 4개) 계급장을 달고 나와 그의 거취에 관심이 쏠렸다.

2대 국가보위부장 이진수의 사위 #온갖 비리 연루돼 평판 안 좋아 #일본인 납치자 문제 협상 참여도 #양강도 반당사건 조작으로 해임된 #김원홍은 총정치국 조직담당 복권

대북 소식통은 “김원홍이 군 간부 인사를 담당하는 실세 자리인 조직담당 제1부국장에 임명된 것을 보면 거의 복권됐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총정치국은 북한군의 정치사업 추진과 군 간부 인사, 군사작전 명령에 대한 당적 통제를 하는 곳이다. 김원홍은 2012년 국가안전보위부장(현 국가보위상)으로 임명되기 이전에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을 맡았다. 그가 총정치국 조직담당 제1부국장이 되면서 총정치국은 황병서 총정치국장-김원홍 조직담당 제1부국장-조남진 조직부국장·염철성 선전부국장 체제가 됐다.

김원홍이 국가보위상에서 해임된 것은 양강도 근로단체 비서가 양강도에서 반당·반혁명 조직을 구축했다고 국가보위성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에게 보고하면서 시작됐다. 김정은이 이를 의심하며 조직지도부에 재조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조직지도부 조사 결과 국가보위성이 수사 과정에서 양강도 근로단체 비서에게 가혹한 고문을 했을 뿐 아니라 반당·반혁명 조직도 국가보위성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국가보위성의 허위 보고에 화가 난 김정은은 김원홍을 대장에서 소장(별 1개)으로 강등조치하고 해임시켰다. 아울러 보위성 간부 5명도 총살시켰다는 전언이다.

“그 정도 일로 처벌하나” 보위성 내부 동요

대북 소식통은 “국가보위성 내부는 그 정도 일로 김정은이 자신들을 가혹하게 처벌한 것에 큰 충격을 받고 동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국가보위성은 수령 옹호와 체제 수호를 명목으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쳐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는 등 온갖 악역을 도맡았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정은이 양강도 근로단체 비서 사건 정도로 국가보위성을 ‘손본’ 것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대북 소식통은 “국가보위성 내부는 ‘우리도 언제든지 당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으며 국가보위성이 ‘체제의 마지막 보루’라는 자부심과 자존감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보위성은 김씨 3대 부자체제를 지켜 왔지만 그동안 영욕의 세월을 겪어 왔고 특히 수장들의 말로(末路)가 좋지 않았다.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출범할 때 설립된 보안국이 국가보위성의 기원이다. 보안국은 경찰의 역할과 함께 정보기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 이후 수차례 명칭이 변경됐다.

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내각의 내무성 산하에 보안국을 개명한 정치보위국을 설립했다. 내무성 정치보위국은 사회안전성 정치보위국(51년), 사회안전부 정치보위국(72년)을 거쳐 73년 5월 사회안전부에서 정치보위국을 떼내 현재 정보기관의 전신인 국가정치보위부로 독립했다. 김정일은 국가정치보위부를 자신이 장악한 당 비서국 직속으로 뒀다.

이 시기에 국가정치보위부를 신설한 것은 김일성 유일사상체계와 김정일 후계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사회 각 부문에 걸쳐 주요 정보를 세밀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국가정치보위부는 반당·반체제 성향을 지닌 주민들을 파악하는 사찰기관으로 확대됐다. 김정일이 직접 관장하면서 노동당의 조직들이 국가정치보위부를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오히려 국가정치보위부로 하여금 당 간부들을 감시하도록 했다.

초대 부장은 김일성의 친척으로 알려진 김병하 사회안전부장(현 인민보안상)이었다. 김병하는 김정일의 후계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그러다 보니 국가정치보위부의 권한 행사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들은 김정일에게 이런 불만을 제기했다. 김정일은 노동당에서 보위부를 담당하던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책임자로 하여 ‘중앙당 검열 그루빠(그룹)’를 국가정치보위부로 보내 집중 검열을 진행했다.

중앙당 검열 그루빠가 닥치면 북한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사돈의 팔촌까지 샅샅이 뒤져 없는 것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앙당 검열 그루빠다. 김병하는 김정일 후계작업에서 숱한 피를 묻히며 충성했으나 82년 결국 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심복들도 처형되면서 국가정치보위부는 쑥대밭이 됐다.

김정일은 김병하를 숙청한 뒤 83년 국가정치보위부의 명칭에서 ‘정치’를 빼고 국가보위부로 변경했다. 제2대 부장은 이진수가 임명됐다. 이진수는 김병하가 국가정치보위부장으로 옮기면서 물려준 사회안전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김정일의 후계체제가 완성된 이후 임명돼 권력 투쟁보다 주로 북·중, 북·러시아 국경 지역 단속 강화에 주력했다.

이진수도 김병하처럼 끝이 좋지 않았다. 87년 8월 23일 황해남도를 시찰하던 중 의문의 시체로 발견됐다. ‘밤나무 가스 질식사설’ ‘교통사고설’ 등 사망 원인을 두고 논란이 많았지만 끝내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노동신문은 8월 24일자 2면에 정보수장으로선 이례적으로 그의 부고를 실으면서 사인을 심장마비로만 밝혔다. 김정일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그때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이진수 사망 이후 김정일은 한동안 국가보위부장 자리를 공석으로 비우고 김영룡 제1부부장에게 조직을 통솔하게 했다. 국가보위부도 93년 ‘안전’을 넣어 국가안전보위부로 개명했다. 김영룡은 김정일의 김일성종합대학 동창으로 83년 국가보위부 부부장으로 있다가 91년 제1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김영룡은 97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현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 수사 지휘권을 인민군 보위사령부에 뺏겼다. ‘청년동맹 비리 사건’은 대중(對中) 무역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당 간부들에게 뇌물로 상납하려다가 들킨 일을 말한다. 당시 국가안전보위부가 사건 제보를 먼저 받았지만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 최용해, 장성택 등이 연루됐다는 것을 알고 우유부단하게 대처했다. 이에 당시 승승장구하던 원응희 보위사령관이 이 사건을 낚아채 마무리를 하면서 국가안전보위부가 권력 다툼에서 뒤로 밀려나게 났다.

김정일, 김병하 숙청 뒤 이진수 임명

게다가 중국에서 해외 간첩조직을 운영하다가 들통나는 사건도 발생했다. 국가안전보위부가 ‘신흥무역회사’를 차려 외화를 벌어서 기술 장비와 현금을 국내로 송금했는데 직원들이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이라는 게 다른 나라 정보기관에 노출된 것이다. 그래서 국가안전보위부는 97년 12월 ‘중앙당 검열 그루빠’의 집중 검열을 받았다. 김영룡도 검열 과정에서 비리가 적발되자 체포 직전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김정일은 그 이후 국가안전보위부장을 임명하지 않고 제1부부장 편제를 유지했다. ‘김정일 운구차 8인’ 가운데 한 명이었던 우동측이 2009년부터 제1부부장을 맡았다. 하지만 우동측은 김정일 사망 이후 계속돼 온 심한 스트레스와 과로로 뇌출혈로 쓰러져 현재 전신마비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은 2012년 집권하면서 공석인 국가안전보위부장에 보위사령관(현 보위국장)을 역임한 김원홍을 임명했다. 그리고 북한은 지난해 6월 국가안전보위부를 국가보위성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지난 1월 김원홍을 해임하면서 다시 그 자리는 공석이 됐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이번 사건으로 국가보위성에 대한 당 조직지도부의 감시와 통제가 더욱 강화됐고 김원홍은 과거보다 훨씬 신중하게 처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분석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원홍 후임으로 국가보위성을 이끄는 사람으로 이정록 제1부상을 지목했다. 그는 “이정록이 국가보위성에서 ‘1번’으로 통하며 김정은의 업무 지시를 직접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정록은 제2대 국가보위부장이었던 이진수의 사위로 국가보위성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보위성맨’이며 주로 해외 업무를 관장해 왔다. 장인의 ‘빽’을 등에 업고 지금까지 승승장구했으며 최근 김정남의 피살 사건을 주도해 그 공로로 국기훈장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국기훈장은 김일성훈장, 김정일훈장 다음가는 훈장이다.

그는 국가보위성 내부에서 평판이 좋았던 김원홍과 달리 ‘돈벌레’로 소문날 정도로 온갖 비리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이정록은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하고 환전상까지 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국가보위성 출신 고위 탈북자에 따르면 중국 출장 때 5성급 최고급호텔에 투숙하며 현지 국가보위성 직원들에게 온갖 뇌물과 접대를 요구해 원성이 자자하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고 한다.

이정록은 일본인 납치자 문제 해결을 위한 비밀회담에도 오랫동안 참여했다. 서대하 국가보위성 부상이 북·일 회담에 ‘일본인 납치 피해 문제 특별조사위원회’ 북한 위원장으로 나가지만 그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이정록이었다. 국가보위성이 납치 문제와 관련한 북·일 회담에 외무성을 대신하게 된 것은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가 방북했을 때 국가보위성-일본 외무성 라인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류경 당시 국가보위성 부부장이 비밀회담의 북한 대표로 참여했으나 2011년 총살을 당한 이후 이정록이 그 일을 맡아 왔다. 그는 최근까지도 중국 다롄(大連) 등지에서 양국의 비밀회담을 이끌었다.

고수석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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