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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서 뒤돌아서면 그 곳이 시작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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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9호 면

저자 : 금강 스님출판사 : 불광출판사가격 : 1만6000원

저자 : 금강 스님출판사 : 불광출판사가격 : 1만6000원

전남 해남의 땅끝마을 달마산 자락에 미황사라는 절이 있다. 서울에서 가려면 강남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5시간, 해남에 내려 덜컹대는 시골버스로 40분을 더 가야 도착하는 곳이다. 하지만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절을 찾아 온다. 스님과 마주 앉아 차 한 잔 앞에 놓고 고단한 삶 이야기를 한 조각 나누기 위해서다. 30년 전 이 절에 들어와 2005년부터 13년째 일반인 수행 프로그램 ‘참사랑의 향기’를 이끌고 있는 금강 스님이 이들의 도반이자 멘토다.

『물 흐르고 꽃은 피네』

사람들은 저마다의 ‘땅끝’에서 미황사를 찾는다. 직업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일상다반사에 지쳐 다 포기할 지경이다. 금강 스님은 조용한 안내자가 되어, 절벽에 선 이들의 마음을 돌려세워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도록 격려한다. 스님이 그동안 손님들과 나눴던 이야기, 그리고 미황사까지 오지 못하고 저마다의 절벽에서 헤매고 있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책으로 엮었다.

절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스님이 가장 먼저 권하는 것은 ‘묵언(默言)’이다. 이는 단지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수없이 떠오르는 질문을 스스로 듣는 기회”다. 마음을 가린 먹구름 같은 번뇌가 흘러가 버리길 기다려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오롯이 떠오르는 고요한 시간과 만날 수 있다.

마음의 고요함은 몸에서 나온다. 자신이 사는 공간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만들고, “단순한 일상을 여일하게, 한결같게 사는 일이 곧 수행”이다. 절이 준비한 프로그램은 그것을 연습하는 시간이다. ‘참사랑의 향기’는 7박 8일 과정인데,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하고 참선하고 밥 먹고 청소하고 법문 듣고 참선하고 요가하고 자는 일정이 반복된다. 매일 아침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자, 오늘의 스케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어제와 같습니다.”

인간사 번뇌에서 놓여난 스님의 고담준론(高談峻論)에 불과하다면 굳이 이 책을 집어들 이유는 없다. 절을 방문한 이들의 사연을 시시콜콜 밝히는 대신, 스님은 열 일곱에 출가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수행의 어려움과 기쁨을 전한다. 친구들이 다들 도시 학교로 진학하고, 혼자 자존심을 다쳐 방황하던 시절 우연히 접한 혜능선사의 『육조단경』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고 한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만겁의 시간이 지나도 만나기 어렵다).’ 어렵게 만난 귀한 이 삶을 헛되이 소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편지 한 장 남기고 절로 향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안부 편지만 받아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였고, 선방에서 학식 높은 스님을 만나면 부러움과 질투를 감추기 어려웠다. “그런데 한 철 한 철 함께 지내는 동안, 옆에서 묵묵히 정진하는 스님들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고 내가 가진 분별의 마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부러운 마음도 결국 내가 일으킨 잘못된 상(像)임을 자각하게 됐다.”

그러나 수행의 목적은 나만의 고요함을 찾는데 있지 않다. 보살행(菩薩行)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나와 같이 돌보는 자비심에서 나온다. 미황사를 찾은 사람들은 매일 이런 구절을 외운다. “아침에 한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저녁에 한 사람의 슬픔을 덜어주기를 서원합니다.”

너도 부처고 나도 부처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기에 남에게 베푼 자비는 곧 나에게 베푼 것이라는 마음가짐에서 진정한 자유가 찾아온다고 스님은 강조한다.

‘물 흐르고, 꽃은 피네’란 제목은 추사 김정희가 초의 스님에게 써준 편지에 담겨있던 ‘수류화개(水流花開)’에서 왔다. 물은 지나온 것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만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저 늘 새롭게 지금을 흐를 뿐이다. 추운 겨울을 견뎌낸 식물은 봄의 온기를 정성스레 끌어모아 꽃망울을 연다. 인생살이도 다르지 않다. 지금에 충실하되, 부지런히 움직여 꽃을 피워낼 것. 그리고 해가 기울면 스님처럼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해도 좋을 것 같다. “오늘 하루 새벽부터 이 순간까지 해야 할 일을 하고, 남을 위해 기도하고, 천천히 걷고, 가만히 있으니 평화롭기 그지 없습니다.”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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