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노예 매매 사죄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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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756년 아프리카 서부의 어느 바닷가. 겁에 질린 10세 흑인 소녀가 백인 장정의 손에 끌려 짐짝처럼 배에 실렸다. 소녀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노예로 팔렸다. 거기서 '프리실라'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는 6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55년간 노예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로부터 249년이 흐른 지난해 아프리카 노예들의 혈통을 집요하게 추적해 온 학자들이 프리실라의 후손을 찾아냈다고 BBC 등이 보도했다. 놀랍게도 토말린 폴라이트(32)라는 프리실라의 후손은 조상이 처음 끌려온 미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농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 앞다퉈 사과= 300년 이상 노예 무역으로 톡톡히 재미를 봤던 유럽.미주가 프리실라의 후예들에 대한 사죄를 시작했다. 영국 성공회는 8일 과거 노예 무역에 교회가 일부 개입했음을 시인하고 사과했다. 산하 기구인 '복음전도회'가 서인도제도의 바베이도스에 소유한 농장에서 노예 노동을 시켰다는 것이다.

지난달 말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노예제는 (프랑스 역사의) 씻지 못할 오점"이라고 밝혔다. 세계 최대 노예 수입국이었던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실바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아프리카의 발전이 늦은 것은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3세기 동안 수탈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6일 아프리카 순방길에 오르기 전에도 흑인 노예에 대한 '역사적 채무'를 강조했다. 서방 국가와 기독교회가 노예제에 대해 사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5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아프리카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킨 유럽.미주의 기독교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재임 중이던 98년 우간다를 방문해 "미국이 항상 아프리카에 올바른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사과했다.

◆ "2007년 전에 끝내자"=그럼에도 최근 이어지고 있는 노예제에 대한 사과가 주목을 받는 것은 시기와 국제 정세 때문이다. 2007년은 영국이 노예제를 법적으로 폐지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다. 영국은 물론 노예 송출 주요 기지였던 아프리카 가나 등 세계 각국이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노예제로 혜택을 본 국가.단체들은 내년에 본격적으로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사과하는 게 현명하다는 판단을 했을 법하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JP모건 체이스, 와코비아 등 과거 '노예 담보 대출'로 큰 이익을 냈던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지난해 일제히 공식 사과했다. JP모건 체이스는 흑인 학생 대상의 장학금도 만들었다. 미국.유럽이 이슬람권과 갈등을 겪고 있는 것도 이번 일과 무관치 않다는 주장도 있다. 중동 국가들과의 문명 충돌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적어도 비이슬람권 흑인들은 우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계산에서다.

지난달 말 시라크 대통령이 "매년 5월 10일을 노예제 철폐 기념일로 지정하겠다"고 발표하자 파이낸셜 타임스(FT)와 BBC 등은 "지난해 파리 폭동 등으로 증폭된 인종 갈등이 시라크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브라질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자원.인구를 바탕으로 남미.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 연대' 맹주를 꿈꾸기 때문이다.

이번 룰라 대통령의 아프리카 방문은 2003년 집권 후 벌써 다섯 번째다.

◆ 끝나지 않은 노예 논란=런던에 본부를 둔 인권단체인 '노예반대 국제운동'은 "노예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1839년 설립된 이 단체는 홈페이지를 통해 ▶세계 인구 중 최소 2000만 명이 빚 때문에 채무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1억7900만 명의 어린이들이 노동 현장에서 혹사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BBC도 세계적으로 매년 80만 명이 인신 매매를 당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시사주간 타임은 코트디부아르 등 아프리카 국가의 코코아 농장에서 30만 명의 어린이가 강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노예반대 국제운동은 "노예란 이름만 없어졌을 뿐 나머지는 예전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강제 노동으로 물건을 만들어 내는 현대판 노예 상인들을 반드시 프랑스 법정에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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