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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꾸눈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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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호 30면

Outlook

 모두가 눈이 멀어 있는 나라에서 그나마 한쪽 눈이라도 보인다면, 그는 막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바로 그런 기대를 품고, 두 눈이 멀쩡한 이들이 사는 곳에서 조롱받으며 살던 한 애꾸눈의 사나이는 장님의 나라로 들어선다. 어찌 되었을까? 그는 그곳에서도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위협적인 존재 내지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만다. HG 웰즈의 단편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후보 여론조사만이 진실로 행세 #상식에 도전하는 지적모험엔 무관심 #눈먼 자들의 나라가 지속되는 한 #시대의 한계 돌파하기 어려워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들에게는, 동굴 밖 태양 아래에서 현실을 체험한 자의 증언 따위는 거짓이거나 허무맹랑한 풍문일 뿐이다. 자신들이 이미 체험하고 설정해 놓은 기준에 대한 질문과 문제 제기는 자신들의 삶 전체에 대한 도전이자 미친 자들의 난동이 되고 만다. 이미 익숙해져서 믿게 된 것만 믿는 사회는 ‘눈먼 자들의 나라’와 얼마나 다를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이 진행되던 지난 1월 20일, 미국 전역에서는 300만 명의 반트럼프 시위가 있었고 취임식 현장의 참여 인원은 역대 최소였다. 체면을 완전히 구긴 셈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측은 이런 보도를 한 언론은 의도적으로 가짜 뉴스(deliberately false reporting)를 유포했고, 진실은 역대 최대였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취임식 때의 사진이 즉각 보도되자 백악관 측은 더는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라고들 여겼다.

그러나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백악관 선임고문 켈리엔 콘웨이는  ‘밋더프레스(Meet the Press)’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말한 것은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이었다”고 맞섰다. 자기들의 주장은 사실이며, 이는 대안적 관점을 가질 때 포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명백한 궤변이고 객관적 사실에 대한 기준을 교란시키는 전술에 불과하다.

가짜 뉴스의 유포 당사자는 바로 자신들이었고, 언론에 대한 역공으로 사실을 뒤집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어찌 된 일일까? 승리한 자는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추궁당하지 않는다는 나치스와 뭐가 다르냐는 비판이 터져 나왔고, 조지 오웰의 『1984』가 다시 베스트셀러 목록 1위가 된 것은 ‘진실이 실종당하는 상황’에 대한 깊은 우려의 반증이다. 이른바 탈 진실 또는 진실이 존중되지 못하는 시대(the era of post-truth)에 확산되고 있는 현상이다.

우리의 언론에서도 팩트체크(fact check)가 등장하는 까닭이나, 정치적 가짜 뉴스가 양산되는 밑바닥에도 진실이 위기에 처하고 있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고 싶은 바를 사실로 여기고 검증은 거부하거나 불편한 진실은 위협으로 간주하고 배제해 버리며 적대의 대상으로까지 몰아 버리는 일은 암울한 시대에서는 되풀이 되어 온 일이다.

중세 유럽의 정신상황은 종교적 독선이 진실을 모색하려는 행위를 파멸시키는 공포의 지배를 낳았고, 냉전체제의 이념지형은 정치적 반대자들을 체제의 적으로 심판했다.

진실은 위험한 것이었고, 모두가 상식이라고 믿는 것만이 진실로 유통된다. 이런 곳에서 지적·사상적 모험은 어리석은 행위이거나 자멸로 가는 길이다. 정치적으로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비판과 대안의 모색은 정지된다.

만일 조금이라고 감행하려면, “나는 일단 상식의 편에 있다”고 시작해야 안전해진다. 상식을 넘는 사유와 제안은 경청의 대상이 아니라 의혹과 축출의 근거가 되고 만다. 눈먼 자들의 상식일 수 있다는 가정은 조금도 허용되지 못한다. 집단적 독선의 피해는 가늠할 길이 없다.

안보는 언제나 무력증강이 본질이며 평화체제에 대한 모색은 비현실적이라는 추궁에 시달린다. 그 자체가 재앙인 전쟁을 어떻게든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구하기보다는, 응징전략만 압도한다. 그러다가 누가 얼마나 죽어나가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응징대상이다. 노동의 자유와 권리를 확대하는 것은 시장에 부담을 주는 것이며 경제성장의 길을 가로막는 비용의 증가로 계산된다. 인간의 삶에 대한 존중과 사유는 사라진다.

이런 현실에서 교육은 생존적응용으로 치닫는다. 제4차 산업혁명의 도래는 교육에 대한 협박으로 작동하고,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세계에 대한 가치교육과 대안적 발상은 낭비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기술이 이끄는 사회를 만드는 창의력 이외의 정치적·사상적 창의력은 의제 밖의 주제일 뿐이다. 근본은 멸시되고 있다.

대선으로 나라가 온통 들썩인다. 후보에 대한 선호도 여론조사만이 진실로 행세하고 있다. 누구도 동굴 밖으로 나가려 들지 않고 있으며, 상식에 도전하는 지적모험에는 관심이 없다. 이미 주어진 안전선에 머물러 ‘정상’의 지지를 받는 것에만 열중한다. 눈먼 자들의 나라가 지속되고 있다. 이러고도 시대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까?

애꾸눈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시대의 전환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언제나 그렇게 태어났다.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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