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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산은·국민연금, 두 수장이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중앙일보

입력

16일 밤 11시 59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가 대우조선해양에 채무조정에 찬성한다는 서면결의서를 제출한 시간이다. 17일 오전 10시 열릴 사채권자 집회를 불과 10시간 앞두고서야 결론을 냈다. 극적인 시간 선택이었다. 


4주간의 협상 과정은 그야말로 지난했다. 지켜보기에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언론 통한 대화, 오해와 불신만 키워 #13일 두 수장이 만난 뒤에야 접점 찾아 #"처음부터 한 테이블에서 논의했어야" #

“언론이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금융위원회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얘기다. 자기 기관 편을 들어 상대방을 압박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직접 만나서 터놓고 얘기해도 모자랄 판에 제 3자, 그것도 언론을 통해 시차로 입장을 전하고 있으니 소통이 될 턱이 없다. 오히려 오해와 불신만 증폭됐다. 국민연금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만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고, 정부와 채권단은 “국민연금이 갑인 줄로 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지리적 거리는 서울에서 전주인데, 지구 반대편 사람보다 소통이 되지 않았다. 실시간 소통 채널이 수없이 많은 디지털 시대에 조선시대의 유별한 남녀 사이처럼 ‘○○이라고 전하라’ 식의 의사소통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불통의 원죄는 금융위에 있다. 지난해 말까지 ‘추가 지원은 없다’던 약속을 몇 달 만에 뒤집으면서 한차례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금융위와 산은은 상대를 압박하는 전술에 익숙했다. 2015년 10월 대우조선 지원 당시엔 압박 끝에 노조의 자구안 동의를 받아냈고, 지난해 5월엔 현대상선에 법정관리 카드를 이용해 해외 선주와 사채권자 협상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최순실 사태의 교훈을 학습한 국민연금은 달랐다. 실리 못지않게 명분이 중요했다. 이를 간과했다.

국민연금의 면피 증후군도 문제였다. 처음엔 정보가 부족하다며 산은에 책임을 돌리더니, 막판엔 논의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탓했다. 일종의 협상 전술이었을지 모르지만 관찰자가 보기엔 책임질 일을 피하겠다는 면피의 태도가 역력했다. 양쪽 다 세련된 프로의 협상자세라고 보긴 어려웠다.

급기야 지난 9일엔 국민연금이 “4월 21일 만기 회사채를 우선 상환하라”는 강수를 뒀다. 누가 봐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을 뜬금없이 내놨다. 정부와 채권단은 격앙됐다. 산은은 “P플랜(초단기 법정관리)으로 가도 계약 취소가 8척밖에 안 된다”며 맞불을 놨다. 평행선을 달리던 양측이 아예 엇나갈 듯 위태로웠다.

양측이 접점을 찾은 건 13일 저녁 이동걸 산은 회장과 강면욱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회동을 하면서다. 세시간 반 동안의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상당부분 해소했다. “애초에 국민연금이 실사보고서 신뢰성을 부정적으로 봤는데, 한국의 대표적인 회계법인의 실사를 신뢰하지 못하면 어디가 할 수 있겠는가라고 설득, 설명했다”는 게 이동걸 산은 회장의 설명이다. 이후 양측은 여러차례 핫라인을 통해 통화가 이어졌고 15일 산은의 최종 확약서 전달, 16일 밤 투자위의 찬성 결정에 이르렀다.

두 기관의 수장이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쉽게 풀릴 일이었는데, 왜 그 긴 시간을 허비하다 막판에야 만났을까. 혹시 이러한 줄다리기 과정까지 계산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점은 16일 최종구 수출입은행장의 발언으로 확인된다. 간담회 마무리 발언에서 최 행장은 준비한 원고에 없던 소회를 밝혔다.

“정부와 산은, 수은이 국가 경제의 큰 현안을 가지고 협의하는데 협의과정이 이럴 수밖에 없었나하는 반성과 아쉬움이 있습니다. 산은·수은과 기관투자자는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같은 이익을 가지고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좀더 원활하게 격의 없이 처음부터 한 테이블에서 논의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반성을 교훈으로 남긴 것이 그나마 이번 협상의 성과일까. 이미 끝난 협상을 굳이 애써 복기하는 건 혹시 있을 다음번 구조조정 때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해서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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