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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1000년 산 느티나무 “서울 아파트단지 강제이주, 나는 많이 아픕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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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나는 1000년 묵은 느티나무입니다. 키 4m에 밑동 지름이 1.6m에 달하는 고목(古木)입니다. 100세 노인의 주름살처럼 구불구불 꼬인 밑동이 세월을 짐작하게 하지요. 태어난 곳은 경북 군위입니다. 마을 주민은 나를 수호신으로 여겨 매년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시대, 6·25전쟁까지 버텨 냈던 저였습니다.

경북 군위 있을 땐 마을 주민 수호신 #8년 전 반포로 옮기며 앓기 시작 #다른 나무서 이식한 가지만 푸른 잎 #조경전문가, 사실상 사망선고 내려 #주민들 “인간에 의한 병, 안타까워”

제 수난사는 고향에 군위댐을 건설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고향이 수몰 위기에 몰리자 인간들이 나를 경북 고령에 옮겨 심었습니다. 그곳에서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서울 강남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이사했습니다.

나는 2009년 6월에 재건축한 서울 서초구 ‘반포 래미안퍼스티지’ 아파트 단지 잔디광장에 새 터를 마련했습니다. 여기가 어떤 곳입니까. 교통에 학군·편의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췄다는 최고급 아파트 단지입니다.

서울 서초구 반포 래미안퍼스티지 아파트 단지에 있는 1000년생 느티나무. 아랫부분은 살아 있지만 윗부분은 고사했다. 윗부분의 잎이 달린 나뭇가지는 다른 느티나무에서 옮겨 붙인 것이다. [장진영 기자]

서울 서초구 반포 래미안퍼스티지 아파트 단지에 있는 1000년생 느티나무. 아랫부분은 살아 있지만 윗부분은 고사했다. 윗부분의 잎이 달린 나뭇가지는 다른 느티나무에서 옮겨 붙인 것이다. [장진영 기자]

재건축조합과 시공사인 삼성물산은 나를 옮겨 심는 데만 10억원을 들였습니다. 제가 고사할 경우 같은 수종의 나무를 심기 위한 보험 비용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조합과 건설사는 “마을 수호신으로 여겨졌던 나무다. 1000년을 버틴 생명력이 주민의 안녕을 책임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입주민에겐 자랑거리였습니다. 최고급 아파트에 자연미까지 더해 줬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요즘 많이 아픕니다. 벚꽃이 만개한 11일 오후 산책 나온 주민이 많았지만 잔디광장엔 저 혼자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멀리서 봤을 때 언뜻 푸른 잎이 보이지만 제 몸에서 난 것은 아닙니다. 다른 느티나무 가지를 옮겨다 붙인 것이지요. 밑동에서 나온 가지는 잘렸습니다. 가운데에는 어린아이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움푹 파였습니다. 제 주변 땅 곳곳엔 영양제를 넣는 구멍이 잔뜩 뚫렸습니다. 옆을 지나던 주민은 “천년 고목이 안타깝게도 제 모습을 잃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 지경이 된 건 서울로 이사온 직후부터입니다. 입주민들과 조경 애프터서비스를 책임진 회사는 이곳에서 처음 맞는 겨울에 제 주변에 천막을 치고 기력이 빠진 저를 살리려 애썼습니다. 몸통은 깁스를 하듯 헝겊으로 둘러쌌습니다. 포도당 주사도 많이 맞았지요. 그럼에도 저는 옛 영광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이식 후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윗부분은 죽었지만 아래는 살아 있습니다. 고사한 부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작은 식재를 보완해 심고 영양제를 주는 ‘보식(補植)’ 작업을 했습니다.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수목관리업체와 계약을 맺고 저를 극진히 보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경 전문가 김동필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의 진단은 조금 다릅니다.

“생물학적으로 죽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나무로서 본모습을 잃었기 때문에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은 셈이죠. 남부지방에 살던 나무를 추운 중부지방으로 옮기면 낮은 기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1000년쯤 된 나무는 본래 자라던 장소에 있어야 가치가 있는데 생육을 제대로 못 시켜 안타깝습니다.”

옛사람들은 고목엔 신비한 기운이 깃든다고 믿었습니다. 아무래도 강남 한복판에서 시름시름 앓는 제게는 어울리지 않는 설명 같습니다.

언젠가 아파트 입주민 인터넷 홈페이지엔 “1000년의 세월을 견디고 자연 풍광 속에 살아온 나무가 인간에 의해 아프게 된 것 같아서 많이 안타깝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풍요 속 빈곤’이 이런 걸까요. 저, 고향이 그립습니다.

글=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사진=장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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