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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측근의 특권,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을 뒤흔드는 진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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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호 22면

[세상을 바꾼 전략] 이승만 대통령 양자 이강석의 부정 입학 파문

지난해 10월 19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교수·학생들이 박근혜 대통령 최측근의 딸 특혜입학 의혹을 제기하며 총장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해 10월 19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교수·학생들이 박근혜 대통령 최측근의 딸 특혜입학 의혹을 제기하며 총장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인 1957년 4월 9일 서울대 법과대 학생 500여 명은 긴급 학생총회를 열었다. 민의원 의장 이기붕의 아들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인 이강석이 부정하게 편입했다는 소문에 따라 소집된 회의였다.

이강석 서울대 부정편입 스캔들 #재발 방지 약속 받고 맹휴 풀어 #결국 이승만 정권 하야 불러 #박근혜 몰락도 측근서 시작 #정유라 부정입학 의혹이 비극 불러 #국정 함께할 인물 신중히 골라야

총회에서 학생들은 이강석을 포함한 부정편입생들의 입학을 취소할 것과 그날 오후 3시까지 이에 대한 학교 측의 확답이 없을 때는 전교생이 등교를 거부한다는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5개 항목으로 된 구체적인 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문제에 관련된 학생대표의 구속이나 그들에 대한 퇴학문제가 나올 시는 계속 동맹휴학을 할 것이며 외부와의 교섭을 일체 중지한다.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학교 출석을 일체 거부한다. ▶학장 또는 교수의 사임이 있을 시는 계속 맹휴(동맹휴학)를 단행한다. ▶강의실은 물론 도서관, 이발관, 식당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학교 측과 절충이 되었을 경우에도 학교 당국의 출석 요청에는 불응하고 학생대표의 정식통고(성명서)가 지상에 보도된 다음에야 각자 행동을 취한다. 학생총회 결의 다음 날인 4월 10일 1200여 명의 학생은 6·25전쟁 이후 첫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인권네트워크 사람들 성균관대 모임 회원들이 지난해 11월 10일 교내에서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동맹 휴학 제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인권네트워크 사람들 성균관대 모임 회원들이 지난해 11월 10일 교내에서 박근혜 정권 퇴진을 위한 동맹 휴학 제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6·25전쟁 이후 첫 동맹휴학 돌입

서울대 총장은 이강석의 입학이 합법적이며, 학생들이 계속 결석할 경우에는 단호하게 처벌하겠다고 말했다. 3개 조항으로 요약되는 서울대 총장의 담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입학, 졸업 등에 관한 사항은 총장의 결정 권한에 속하는 것인데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법과대 교수회 및 학장회에서 완전 합의를 보고 입학을 허가한 것이다. ▶종전부터 순국열사의 자녀, 명예제대 군인 및 외국인 등에 대해서 특별고려하는 예가 있으므로 일국의 행정 수반이며 또한 일생을 조국광복을 위해서 몸을 바친 이승만 대통령의 자제를 국립대에서 특별고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총장은 학생의 자격과 학력 등 수학능력을 판단하여 입학을 허가하는 것인데 이강석의 경우는 서울대에 입학할 충분한 자격과 학력을 구비하고 있다.

이강석 편입 문제와 관련해 학생 측, 학교 측, 정부 측 모두 법과 원칙을 강조했는데 결론은 정반대였다. 먼저, 문교부 장관은 학생들의 입학취소 요구가 총장의 권한을 침해하는 불법행위이며, 집단적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전제국가에 있을지 모르나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고, 주동 학생의 처벌 여부를 학교 당국에서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맹휴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교수와 학생들을 경찰이 내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치안국장은 진상을 알아보는 데 불과한 것이며 경찰은 일체의 학원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학생 측에서도 법치주의를 강조했다. 한 일간지에 실린 학생 측 글에서는 “특권의식의 유무가 민주사회와 전제사회 내지 봉건사회를 구별하는 가장 본질적인 징표”라며 “(이강석 입학은) 법의 지배에 우선한 사람의 지배”라고 비판했다. 이어 “법을 공평하게 집행해서 사회질서를 바로 잡아야 할 임무를 띤 권력층의 인사들이 법을 깨뜨리고 사리를 추구하는 소행을 우리는 묵인해도 좋은가? 특권의식이 횡행하는 사회를 우리는 민주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고 국민 여론에 호소했다.

동맹휴학 사흘째인 4월 12일 학생 지도부와 학교 측 간에 타협안이 마련됐다. 동맹휴학의 주도자나 가담자를 처벌하지 않고 또 이강석의 입학을 취소하지 않는 대신에 앞으론 정당한 수속을 밟지 않고는 입학허가를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학생 지도부는 타협안이 학생총회에서 추인돼야 한다고 설명했고, 학교 측은 학생총회 소집에 동의했다.

4월 13일(토요일) 학생총회는 약 1000명의 참석 학생들에게 무제한 발언의 기회를 주어 7~8시간 동안 진행됐다. 회의 처음부터 타협안에 반대하는 발언들이 잇달아 나왔지만 학생들은 긴 회의에 지쳐 분노가 가라앉았다. 총회 의장 남재희는 총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학생회 임원의 일괄사표를 받느냐는 양자 가운데 하나를 박수로 가결하자고 제안했다. 학생회 임원진을 교체하고 싶지 않은 대다수의 학생들로서는 총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훗날 남재희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의사진행 때문에 오히려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결국 학생들은 총장의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들이고 4월 15일부터 등교를 재개했다.

60년 전의 동맹휴학은 실패한 것으로 얼핏 생각되기 쉽다. 이강석의 입학이 취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대한민국 정권의 향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동맹휴학이었다. 지배세력의 특권의식을 부각시켜 자유당 정권의 몰락에 일조했던 것이다. 결국 이강석은 같은 해 서울대를 자퇴하고 다시 사관학교와 미국 보병학교 등에서 군사교육을 받아 군인의 길을 걸었으며, 편입 사태 3년 후에는 가족을 권총으로 쏘고 본인도 자살하는 불행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성균관 유생들 요구 관철 위해 집단행동

동맹휴학은 근대에 와서야 발생하기 시작한 현상이 아니다.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성균관이나 식당에 일제히 출입하지 않던 공관(空館) 또는 권당(捲堂)도 일종의 동맹휴학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대의 동맹휴학은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400건이 넘게 집계될 정도로 많았다. 직접 시위를 주도하거나 참여하게 되면 그에 따르는 위험 부담이 큰 상황에서 소극적으로나마 할 수 있는 집단행동이 동맹휴학이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적극적인 시위 참여에 큰 어려움이 없으면 동맹휴학의 빈도와 효과는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맹휴학은 외국에서 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거의 대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대체로 1229년 파리대학 사태를 최초의 동맹휴학으로 본다. 사회적 파급이 컸던 동맹휴학으로는 1968년 5월 프랑스 사회를 휩쓴 소요 사태가 대표적이다. 교육이 공립학교들로 운영되는 나라에서는 동맹휴학으로 수업일수를 못 채우면 특정 학년만의 낙제 또는 부실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차질이 발생하기 때문에 동맹휴학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는 동맹휴학이 매우 드물다. 1970년 봄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과 4명의 켄트주립대 학생 피살 사건 직후에 전개된 동맹휴학이 최대이자 최근의 것으로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미국 대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시위의 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등록금이 비싼 사립학교 중심의 교육시스템에서 수업 불참은 곧 경제적 불이익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더구나 동맹휴학에 동참하지 않고 수업에 출석하는 학생들이 많다면 동맹휴학 참가자는 결석으로 인해 성적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이처럼 집단행동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동맹휴학이 어렵다.

파업과 구분, 클래스 보이콧으로 불러

동맹휴학은 영어로 스트라이크(strike)로 표기된다. 스트라이크의 전형적 의미인 노동자 파업은 회사 이윤을 줄이고 또 앞으로 더 줄일 수 있음을 회사 측에 보여줘 양보를 얻으려는 것이다. 반면에 동맹휴학은 학교 측의 재정 수입을 줄여 학교 측에 압력을 가하려는 게 아니다. 학교 측의 수입을 줄이려면 등록금을 납부하지 않고 차라리 자퇴하는 행동이 효과적일 것이나, 학생들이 자신에게 브랜드 가치를 제공해 주는 학적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집단적 항의인 동맹휴학을 노동자 파업과 구분하여 영어로 클래스 보이콧(class boycott)로 부르기도 한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제31조는 교육을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학부모가 주도한 초등학생의 등교 거부 행위는 교육의 의무를 거부할 수 있느냐 하는 논쟁을 야기할 수 있다. 또 학벌이라는 위계적 브랜드와 반(反)특권적 민주질서 간의 양립가능성 문제도 있다. 실제로 민주화의 견인차로 평가되는 동맹휴학들뿐 아니라 기득권 수호라고 비판되는 동맹휴학들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입시 위주의 교육열 때문에라도 학내 문제가 학내에만 머물 수 없다는 점이다.

60년 전 이강석의 서울법대 입학 사태는 오늘날 다시 거론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최측근의 딸 정유라가 이화여대에 입학하고 재학하는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 때문이다.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라 유·무죄가 판결되지 않았는데, 의혹의 단계에서 이미 권력자의 지지 기반을 흔들었다. 이어서 터진 대통령과 최측근에 관한 후속 폭로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일련의 촛불집회와 몇몇 대학의 동맹휴학이 전개됐다. 집단행동 참가에 수반되는 부담보다 권력자에 대한 분노가 훨씬 컸기 때문에 집단행동이 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결국 대통령은 파면되고 구속됐다.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을 뒤흔든 진원지는 최측근의 특권이다. 진앙이 가까울수록 피해가 심각하듯이, 문제되는 인물이 권력자의 측근일수록 권력자는 더 큰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다. 제19대 대통령선거를 꼭 1개월 앞둔 지금, 국정을 함께 운영할 인물들의 능력과 성품을 잘 간파하는 것이 국가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 가운데 하나임을 더욱 느끼게 된다.

김재한 :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 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 2010년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 적 분석에 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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