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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케 소믈리에 추천 술·안주 찰떡 궁합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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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호 28면

오늘은 우리 부부의 얘기다. 자타공인 술꾼, 사람 좋아하는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룬지 어느덧 7년째. 이 조합의 결과는 물 보듯 뻔하다. 신혼 초부터 우리 집은 주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44주 동안 매주 집들이를 했을 정도다. 남편은 지인과 술 마시다 필이 꽂히면 집으로 데려오기 일쑤.

이지민의 “오늘 한 잔 어때요?” <25> #기분 좋은 날엔 ‘기분’

가장 황당했던 에피소드는 작년에 벌어졌다. 남편이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이 있다며 출동했다. 새벽 2시가 되도록 오질 않아서 전화해봤더니 상당히 취한 상태. 집 앞에 다 왔다기에 베란다로 내다보니 어라? 택시에서 내리는데 누군가가 함께 있다. 순간 멘붕이 왔다.

헐. 문 앞에서 웃고 있는 남편의 상태를 보니 이미 9부 능선을 지나고 있다. 옆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낯선 분이 서 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얼른 들어오세요.” 일단 화이트 와인과 과일을 꺼내왔는데, 남편이 꾸벅꾸벅 졸더니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 손님도 당황했다. 에라 모르겠다. 손님부터 대접하고 보자 싶어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보는 분이니 정보도 전혀 없고, 술 이야기나 해야겠다 싶어 집에 있는 다양한 술을 꺼내놓았다. 유쾌한 분이었다. 게다가 상당한 주당.

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색함도 차차 사라졌다. “그런데 어디서 드시고 오셨길래 남편이 저렇게 신이 난 거에요?” “제가 즐겨 가는 곳인데 논현역 근처의 ‘기분’이라는 이자카야에요.” “아~ 저도 거기 종종 가요.”

이야기 꽃을 피우다 기분 좋게 자리를 파하고 웃으며 손님을 배웅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내게 미안해 했다. 알고 보니 심지어 어제 처음 만난 분이라고. 다시는 새벽에 손님을 데려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몇 주가 흘렀다.

야근 와중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시계를 보니 곧 11시. 전화를 받았더니 역시나 들떠있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고. 그리고 그날 우리 집에 왔던 분이 정말 고마웠다며 형수님한테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단다. 그러면서 ‘기분’에서 보자고 얼른 오란다.

이자카야 기분(氣分). ‘기분이 좋다’의 그 기분이다. 사케부터 일본 소주, 하이볼, 생맥주 등 80여 종의 술이 구비돼 있다. 바 맞은편 벽에는 20여 종의 디스펜서(dispenser·술을 정해진 양만큼 뽑아내는 도구)가 설치돼 있어 잔술로도 즐길 수 있다. 새벽 3시까지 운영해 2, 3차로 가기 좋다.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이 집 박승현 사장이 사케 마스터라는 점. 6년 전만 해도 그는 외국계 회사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아내와 오사카 여행을 갔다 꼬치구이 골목의 맛집에 반해 술집을 차려야겠다는 꿈을 꾸었고, 일본에 가서 잠시 요리도 배웠다.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회사를 그만두고 꼬치구이 전문점을 차렸다.

그런데 꼬치구이는 구이요리 과정에만 집중해야 했기에 손님과의 대화도 어렵고 홀을 보기도 어려웠다. 결국 이자카야로 콘셉트를 바꿨다. 처음엔 국산 소주, 맥주도 팔았으나 손님들이 일본 술을 맛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고구마 소주와 보리 소주 등 엄선한 일본 술로 품목을 늘려갔다.

손님들에게 술을 제대로 권하려면 술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부부는 사케 소믈리에 자격을 취득했다. 아내 박소영 씨는 한국에서, 남편 박승현 씨는 일본에서 ‘기키자케시(사케 소믈리에)’ 자격증을 땄다. 게다가 남편 박씨는 사케 마스터에 도전, 343번째 사케 마스터가 됐다. 일본 술의 매력을 알리고픈 마음에 3개월에 한 번씩 사케 스쿨도 진행한다. 70종의 술을 맛보며 배울 수 있다.

먼저 나온 메뉴는 오이 홀릭. 가장 인기 있는 안주다. 홍두깨로 두들긴 뒤 폰즈 소스를 곁들여냈다. 오이의 사각사각한 상큼한 맛에 짭조름한 소스가 스며들어 있다. 술 한 모금에 오이 한 점이면 다른 안주가 필요 없을 정도다. 매칭한 술은 사케 ‘은하철도의 밤’.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모티프가 된 단편 동화 『은하철도의 밤』을 쓴 미야자와 겐지의 고향 이와테현에서 만든 술로, 작품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누룩향은 적고 감칠맛이 있어 오이 홀릭의 폰즈 소스와 잘 어울린다.

이어 나온 조개 술찜은 싱싱한 문어 바지락에 버터와 청주를 넣고 끓여냈다. 술은 자색 고구마로 만든 ‘적토마’. 소량 생산되는 고구마 소주로 목 넘김이 좋고 초보 입문자들이 편하게 마시기 좋다. 입안에 여운이 많이 남는 조개의 맛과 향을 싹 정리해준다.

고기 메뉴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우설이 나왔다. 일본식 숯불고기인 야끼니꾸의 대표 메뉴다. 식감이 부드럽고 적당히 기름기가 있어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다. 매칭한 술은 ‘귀한집’ 이라는 뜻의 고야. 국내 이자카야 다섯 곳이 함께 일본 간토 지방 북서부에 있는 군마 현의 양조장에서 직접 골라 들여온 탄산 사케다. 우설의 기름진 맛을 깔끔하게 잡아주며 피니쉬가 좋다.

마지막은 국물 요리로 후쿠오카 지역의 겨울철 보양식 모츠나베가 나왔다. 일본식 곱창전골이다. 대창을 뒤집어 기름기를 덜어내고 고기 육수에 담백하게 끓여냈다. 사장님이 권해준 술은 오키나와의 소주 아와모리. 진한 타입의 국물엔 개성이 강한 술이 좋다고 ‘봄비’라는 뜻의 하루사메를 맛보았다. 맛과 향이 강한 편이라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술꾼들이 즐겨 찾는단다.

황당했던 그날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신나게 먹다 보니 어느덧 2시. 남편도 얼큰 취한 상태라 기분 좋게 ‘기분’을 나섰다. 그때 갑자기 집으로 가서 딱 한잔만 더 하자는 남편. ‘아니 이 남자가 또??’ 온 힘을 다해 등짝 스매싱을 해주었다. “오늘은 안돼!!” ●

이지민 : ‘대동여주도(酒)’ 콘텐트 제작자이자 F&B 전문 홍보 회사인 PR5번가를 운영하며 우리 전통주를 알리고 있다. 술과 음식, 사람을 좋아하는 음주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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