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사의 '인식' 뒤집는 '재인식'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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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은 27년간 번창해 온 진보적 역사관을 다시 진단하고 해체하려는 시도로 풀이될 수 있다. 해전사의 좌파 논리를 정면으로 비판한다는 점에선 보수.우파 성향으로의 선회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탈민족주의를 주요 논리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전의 보수 논리와 차별화된다. 해전사가 우파 반공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좌파 민족주의를 일으켰다면, 재인식은 다시 이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우파 탈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양상이다. 탈민족주의를 전파해온 박지향(서울대 서양사) 교수는 "최근 발표된 한국 근현대사 연구물 가운데 대표적인 28편을 엄선했고, 각 필자들이 대폭 가필해 실었다"고 밝혔다.

◆ 좌파 민족주의 비판=박 교수는 해전사를 '민족 지상주의와 민중혁명 필연론'으로 규정하며 비판했다. 총론 격인 첫 번째 논문 '왜 다시 해방 전후사인가'를 쓴 이영훈 교수는 해전사의 역사인식을 "민족과 혁명의 이중주"라고 단정했다. 해전사류의 인식은 과거의 역사를 이분법적으로 재단하고, 현재의 잣대로 과거의 시행착오를 비난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이다.

해전사가 민족 지상주의로 도배돼 있다면 재인식은 탈민족 혹은 민족 해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교수는 민족이란 말 자체가 20세기에 만들어진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민족과 탈민족의 시각은 식민지시대와 친일잔재 청산, 한국전쟁과 이승만 평가 등에서 모두 대립각을 세운다.

친일잔재 청산의 경우, 해전사는 북한에 비해 남한의 청산이 미비해 부끄러운 역사를 이어왔다고 한 반면, 재인식은 남북 모두 단절보다는 식민지시대와의 연속성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총독부 산하 각급 관료기구와 학교 등에서 복무한 테크노크라트적 협력자들은 해방 후 국가 건설에 크게 기여했다"며 "박정희 같은 인물들이 성장한 사실에서도 식민지 유산을 찾아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 20세기 문명사관 제시=이 교수는 문명사관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일제 식민지시기를 "조선의 전통문명과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유럽 기원의 근대문명이 상호 융합하는 시대"로 보고 있다. 그리고 해방.분단.건국.전쟁.복구.한미동맹, 그리고 4.19로 이어지는 해방 전후사의 후반을 "나라 세우기 과정으로 이해하고 평가하자"고 제안했다.

문명사관은 결국 식민지 근대화론과 연결된다. 식민지 시절의 자본주의와 경제 발전을 인정하는 논리다. 박 교수는 "1910~40년 세계 자본주의가 침체와 위기를 겪는 동안 조선은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고 산업 구조도 근대화했다"고 했다. 그는 또 "식민지 시절 대중의 일상적 삶은 협력과 저항, 친일과 반일의 잣대로 구분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다층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 이영훈 교수, 진보학자 실명 비판=이영훈 교수는 해전사의 주요 필자인 강만길(전 고려대 교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과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실명을 거론하며 강하게 비판해 눈길을 끌었다. 강.최 두 교수는 진보 성향의 역사.정치학계의 간판으로 꼽히는 학자다.

이 교수는 강 위원장의 '해방전후사 인식의 방향'(해전사 2권)과 최 교수의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해전사 4권)을 비판했다. 각각 '민족 지상주의'와 '혁명의 이념'이란 비판을 받았다. 이 교수는 최 교수의 글에 대해 "진정한 의미의 실증에 바탕을 둔 근대적인 역사학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강 위원장의 민족주의 강조에 대해서는 "모든 역사를 제쳐 놓고 민족만이 역사 쓰기의 유일무이한 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 학계는 신중한 반응=해전사 필자인 한 진보학계 중진 교수는 "우선 책을 구해 충분히 검토한 다음 적절한 대응 방안을 찾아보겠다.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밝히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진보 성향 역사학계의 중진 서중석 교수(역사문제연구소장) 역시 "책을 본 학자들 간에 평가 논의가 있을 것이다. 기다려 보자"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 바로잡습니다

2월 1일자 1면 '뉴라이트판(版) 해전사 나온다' 기사, 9일자 1, 5면의 '뉴라이트판 해전사 나왔다' 기사, 13일자 1면 '과거사위 활동 검증할 것' 기사 등에서 언급한 '뉴라이트'란 표현은 맞지 않기에 바로잡습니다. 8일 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란 책은 진보.좌파 연구서인 '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을 전면 비판하는 성격의 논문집입니다. 본지는 8일자 '바로잡습니다'에서 "뉴라이트라는 표현은 지적 흐름을 의미하며, 구체적인 연구집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9일자 보도 이후 이를 혼동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새 책의 편집위원인 이영훈(서울대).김일영(성균관대) 교수 등은 지식사회의 뉴라이트 흐름을 대표하는 연구집단인 '뉴라이트네트워크'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집위원인 박지향 교수 등 일부는 탈민족주의적 역사관을 지닌 학자입니다. 박 교수는 책의 머리말에서 "'해전사'를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을 접하고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출간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28명의 필진이 집필에 참여한 동기는 같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학문적 성향은 다양합니다. 따라서 다양한 성향의 필진이 참여해 만든 책을 '뉴라이트판'이라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재인식'을 '뉴라이트판 해전사'라고 더 이상 표현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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