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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과거를 걷어내고, 미래로 갈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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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덕수궁에서 광화문으로 걸었다. 지난 1일에도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덕수궁 정문 앞에서 시청광장으로, 서울시의회를 거쳐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다시 광화문에서 경찰 차단벽을 넘어 덕수궁으로-.

과거의 진실은 밝혀져야 하지만 #그것이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아 #촛불과 태극기, 광장정치가 낳은 #증오와 분열 치유하고 통합해야 #재판과 세월호 조사 시작했으니 #새로운 미래 만드는데 힘 모아야

추위는 가셨다. 봄기운이 완연하다. 가벼운 소나기 덕분에 햇살이 더욱 눈부시다. 덕수궁 정문 앞 무대에서 군가가 요란하게 울렸다. 광장을 가득 채운 인파 속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흔들며 춤을 추는 노인도 있다.

봄기운에 음악에 춤에… 흥겨워야 할 거리가 오히려 무겁게 가라앉았다. 춤추는 노인의 얼굴마저 우울함이 느껴진다. 연두색 수의 503번. 직선제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과반수인 51.6%, 1577만3128명이 만든 대통령이 탄핵되고, 구속됐다. 혹은 사랑하는 지도자가 3.2평 감방에 갇힌 게 안타깝고, 혹은 그를 뽑은 우리의 손가락이 원망스럽고, 혹은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는 우리의 미래가 불안하다.

이날 여의도와 석촌호수에는 벚꽃축제가 시작됐다. 그러나 광장에는 꽃 대신 증오와 불안과 비난과 암울함이 가득하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허우적대는 노인, 양지바른 시의회 계단에 모여 앉은 노인들의 찡그린 눈길에는 생기보다 허무함이 내려앉았다.

세종대왕 동상 앞 대형 스크린에서 젊은이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앞에는 각종 깃발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목표를 이루고 난 광장에 새로운 목소리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 천막에는 박근혜의 ‘7시간’을 비난하는 구호들이 잔뜩 붙어 있다. 세월호는 건져내 목포신항에 올려놨다. 아직 광화문광장에 남은 천막과 노란 깃발이 철지난 겨울 외투처럼 느껴진다.

과거의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과거의 진실은 미래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꼭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미래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수의번호 503이, 세월호를 채우고 있는 펄이 미래의 청사진은 아니다. 탑골공원을 시청광장에 옮겨놓는다고 과거를 되돌릴 순 없다.

광장 목소리와 관계없이 대통령 선거는 달려간다. 이제 36일 남았다. 최순실과 박근혜의 진실, 세월호의 사라진 7시간과 9명을 이야기하며 여기까지 왔다. 이번 주에 모든 정당 후보가 확정된다. 그러나 과거가 생생할수록 미래는 더 안 보인다. 촛불과 태극기와 광장의 정치는 증오와 분열과 보복과 청산을 이야기한다. 화해와 통합의 길은 멀다. 우리에게 그런 여유가 남아 있는가.

북한은 6차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 이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극단적인 선택으로 끌려들어갈 위험한 순간이 다가온다. 중국은 이런 상황을 외면하고 손목을 비틀어 대고, 미국 트럼프 정부의 단호함은 긴장감을 높인다. 주한 일본대사는 3개월이 넘게 돌아오지 않고 있다. 주변국 관계는 최악인데 대통령 유고로 대화 통로마저 끊어졌다.

경제는 위기설이 나올 정도로 취약하다. 외환위기 이후 최악이라고 한다. 내외 환경이 모두 불안하지만 사령탑이 없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거의 1년을 나침반 없이 표류하고 있다. 미국의 보호주의, 중국의 보복조치가 충격을 던지고 있다. 5년마다 새 정부는 지난 정부의 정책을 뒤집어왔다. 균형발전은 녹색성장이 되고, 다시 창조경제가 됐다. 다시 그 시기가 왔다. 장기계획은커녕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 철거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판이다.

더구나 다음 정부는 준비할 시간도 없다. 전임자의 남은 임기 동안 차분하게 사람을 뽑고, 기존 정부가 펼쳐놓은 정책을 파악해볼 여유가 없다. 선거기간 동안 표를 얻기 위해 과장하고, 부풀리고, 주먹구구로 던져놓은 공약이 많다. 이것을 현실에 맞게 다듬을 새도 없다. 시간표에 맞추기 위해 달리는 시외버스처럼 ‘개문(開門) 발차’ 해야 하는 처지다.

정치권에 중요한 건 선거다. 표가 되느냐 아니냐로 판단한다. 시민들이 먼저 나설 수밖에 없다. 이제 고개를 넘었다.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갈 때다. 박근혜와 최순실은 법의 심판에 넘겼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면 된다. 촛불의 힘으로, 태극기의 힘으로 압력을 넣는다고 달라질 허약한 나라는 아니다.

세월호 텐트와 현수막이 박근혜 정부를 끝냈다. 이제 걷어도 될 때가 됐다. 과거의 진실을 규명했다면 그것으로 시스템도 고쳐야 한다. 과거에 대한 단죄를 넘어 다시는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한 걸음 더 내디딜 시점이 됐다. 바다만 봐도 눈물이 나오는 비극을 겪고도 달라진 게 뭔가. 다시 박근혜의 ‘7시간’을 겪지 않으려면 철저히 검증하고, 적극적으로 투표해야 한다. 한 걸음이라도 먼저 미래를 향해 걸어가야 자식들은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