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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원라인' 진구, 느물느물 웃을 때 더 무서운

중앙일보

입력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힘 빼고 편하게 갔다. 어느 순간 내가 진짜 놀고 있더라고.” 영화를, 연기를, 촬영 현장의 모든 순간을 원 없이 즐겼노라는 고백. ‘원라인’으로 돌아온 진구(36)는 어느 때보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사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아든 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재밌지만, 내 영화는 아니다.”

2015년 가을 무렵이었다. 진구는 그해 6월부터 시작된 TV 드라마 ‘태양의 후예’(2016, KBS2) 촬영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던 차였다.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2015년 10월 그리스로 촬영지를 옮기고 나니, ‘원라인’ 시나리오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아라호바’라는 산골 마을은 책 읽기에 지독히도 좋은 환경이었다. 한적했고, 햇빛은 그저 화창했다. 촬영이 없는 날, 그는 다시 시나리오를 손에 잡았다. “거대한 범죄 이야기인데도, 책장이 그냥 술술 넘어가더라. 도저히 다음 영화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 타이밍이었는데도 호기심이 생겼다.” 한국으로 돌아온 진구는 양경모 감독과 만나 결국 출연을 결정했다. 오랜 드라마 촬영으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그에게 양 감독은 제안했다. “힘 빼고 편안하게 합시다, 능구렁이처럼.”

사진=전소윤(STUDIO 706)

사진=전소윤(STUDIO 706)

그 능구렁이가 바로 ‘원라인’에서 진구가 연기한 장 과장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냐. 사기 범죄 일당의 리더이자 설계자요, 평범한 대학생 민재를 ‘작업 대출’ 세계로 끌어들이는 문제의 멘토다. 사기에 도가 튼 그는 경찰 수사망을 잘도 피해 간다. 사기꾼 주제에 직업관도 뚜렷해서, 은행 돈은 빼돌려도 서민 잡는 전세 대출·차량 대출·보험 대출은 절대 안 한다. 사치스럽지도 않고, 딱히 물욕도 없다. 어쨌거나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젠틀하고 매너 있게” “인간답지 않은 일을 인간답게 하는 재주”를 가진 사기꾼 장 과장에게 진구는 묘한 호기심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또라이’ 같은데,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면 저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은행과 경찰의 뒤통수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거지. 가득 쌓아 둔 돈다발이 자기의 훈장이라 생각하면서.”

원라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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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에서의 분량만 놓고 보면, 장 과장은 대단한 역할이 아닐지 모른다. 영화 중반부에 진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장 과장이 경찰 수사망을 피해 잠수 타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하나 캐릭터 비중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대한 돈이 움직이는 ‘원라인’의 세계관을 이해하려면, 장 과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작업 대출이라는 판을 설계한 것도, 후반부에 그 판을 뒤흔드는 ‘키’도 그이기 때문이다. 하여 진구로서는 적은 분량을 감수할 게 아니라 감사해야 할 노릇이었다. “임팩트는 최고지. 작업 대출의 방식, 은행이 망하지 않는 구조 등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꿀 대사’도 워낙 많았다. 그런 대사는 말 자체에 힘이 있어서, 구태여 배우가 힘을 주거나 보태지 않아도 되거든. 이렇게 중요한 장면과 대사를 독차지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괜한 소리를 했다가 내 몫을 뺏길까 싶어 입 다물고 있었지만(웃음).” 

진구는 ‘원라인’ 촬영 현장이 유독 즐거웠단다. “배우로서 혜택이 많은 캐릭터”를 받았고, “말이 통하는 감독”을 만났고, “박병은 선배를 비롯해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여서 좋았다. “전반부 촬영을 끝내고 한 달쯤 쉬는데, 촬영 현장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더라. 쉬는 동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도피 생활로 수척해진 모습을 보여 주려 몸무게를 7㎏이나 줄였다.”

원라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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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과장의 가장 큰 무기는 상황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다. 돈의 흐름과 생리를 훤히 꿰고 있기에, 박 실장(박병은)처럼 폭력을 쓰지도 않고, 홍 대리처럼 발품 팔아 개인 정보를 모으러 다니지도 않는다. 누가 찾아오든 그저 쓱 보면 척 하고 답이 나온다. 극 초반 대학생 민재의 얼굴을 처음 본 장 과장은 말한다. “직장인 신용 담보 대출로 가자.” “너 같은 놈은 얼굴이 무기니까, 무조건 여자 은행원 앞으로 가라. 오케이?” 그러나저러나 사기는 위조하고, 등쳐 먹고, 협박하는 것이 일상인 세계 아니던가. 눈앞에서 수억원이 오가고 주먹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난 평화적인 게 좋더라”라고 말할 뿐.

진구가 장 과장에 매료된 것도 그런 예리한 안목과 태연함 때문이었다. 범죄자·배신자·건달·양아치 연기는 해 봤어도, 장 과장 같은 베테랑 캐릭터는 처음이었다. 그런 장 과장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그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힘을 빼자. 극적인 상황일수록 더 편하게 가야 한다”고. 단순히 ‘태양의 후예’ 서대영 상사를 연기하며 몸에 밴 군기를 빼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억지 표정으로 만든 카리스마가 아닌 능글능글한 독기를 장 과장에게 불어넣고 싶었다. “굳이 티 내지 않아도 무서운 기운이 느껴졌으면 했다. 원래 큰소리치는 사람보다 느물느물 웃고 있는 사람이 더 무섭지 않나. 살다 보니 그렇더라고.”

원라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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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생’(2005, 김지운 감독) ‘비열한 거리’(2006, 유하 감독) ‘마더’(2009, 봉준호 감독) 등 초기작 속 그의 캐릭터에는 쉬이 헤아리기 어려운 무엇이 늘 뿌리박혀 있었다. 진구는 그 미스터리한 토대 위에 필모그래피를 쌓아 왔다. 어느덧 그는 가벼운 미소만으로도 살벌한 긴장감을 불어넣는 배우가 됐다.

“내게서 두 가지 모습을 본다는 사람이 많다. 악당을 연기해도 연민이 느껴진다 하고, 착한 역할을 맡아도 왠지 뒤통수칠 것 같은 불안함이 든단다.” 진구는 그런 말을 자주 한다. “배역은 어떨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저 착한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다”고. 하나 진구는 안다. 그 특유의 어두운 면모가 독이 아니라,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으며 얻은 자산이란 걸.

“양면성이 어느새 내 장기가 됐다.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즐겁다.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늘 궁금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런 숙제를 던지는 일, 내겐 엄청난 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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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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