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대세론 지원하는 친박세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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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호 39면

김진국 칼럼

이번 대통령 선거는 묘하다. 먼저 결과부터 내놓고 시작하는 게임 같다. 야권 후보끼리 경쟁을 벌인다. 적어도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들에서는 그렇다. 어떤 여론조사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가 선두를 다툰다. 함께 경합하는 후보도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다.

대통령과 친박 반성 않는 태도로 #중간세력 설 땅 잃고 보수 몰락 자초 #걸림돌 친박이 극단 대결 계속하면 #보수의 새 판을 짜는 수밖에 없어

보수 정당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보수 세력이 기대를 걸었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시작하자마자 주저앉았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출마 자체를 포기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지지도가 너무 낮게 나와 실망한 것이다.

문화일보-엠브레인이 23일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영남지역에서도 문재인 전 대표(26.7%)가 홍준표 경남지사(14.9%), 유승민 의원(2.6%)을 압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안희정 지사(16.1%)도 이들을 앞선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문재인 전 대표(26.5%)라고 가정해 안 지사를 빼고 대결시켜보니 대구·경북지역에서 홍준표 지사(19.8%)는 안철수 전 대표(21.1%)에게도 밀렸다.

다른 보수 진영 후보들은 지지율이 오차 범위 안에 있어 지지율이라 이야기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여론조사만 보면 ‘보수의 몰락’이라 할 만하다. 물론 영남지역 부동층이 18.8%나 된다. 이들이 모두 보수 후보를 지지해야 겨우 영남권에서 경쟁이 될 정도다. 그래 봤자 이전에 보수 후보가 얻었던 지지율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일부 보수층 지지자들은 여론조사의 응답률이 낮은 것을 들어 훨씬 많은 ‘샤이(shy) 보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친박 맞불 집회’가 열리기 전이라면 그런 말이 설득력을 얻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는 유권자라면 5월 9일 투표장에 나가지 않거나 보수 후보를 찍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가. 당연히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태 탓이다. 더구나 보수 진영의 대응이 더욱 악화시켰다. 먼저 탄핵 사태가 장기화했다. 오랜 시간 진실 공방을 벌이면서 국민들이 스스로 어느 한편에 정체성을 갖게 됐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시시비비를 가려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건 반성이 없다는 점이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24일 JTBC가 최순실의 태블릿을 보도한 이후 3번에 걸쳐 사과했다. “저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진심을 느낄 수 없게 만들었다. 번번이 반성보다는 제기된 의혹에 대한 변명이 앞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해명이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진퇴 문제를 국회에 맡긴다는 약속도 정치적 복선을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박 전 대통령만 그런가. 친박 세력이 버티고 있는 자유한국당은 더 심하다. 반성 모드에서 한참 벗어났다. 오히려 공격적이다. 일부 의원들은 ‘친박 집회’에서 탄핵을 좌파들의 반란으로 규정했다. 탄핵의 사유가 된 모든 사실을 부인했다.

또 한 가지는 주장이 양극화했다는 점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을 두고 오랫동안 전선(戰線)을 형성해왔다. ‘촛불집회’와 ‘친박집회’가 세(勢) 대결을 벌여왔다. 양편 모두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졌다. 보수 진영에서도 합리적인 세력, 반성하고, 개혁하려는 세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각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친박 세력이 보수 전체를 대변하는 모양이 됐다.

이번 선거가 어떤 결과로 끝나건 그건 국민의 뜻이다. 그러나 건강한 정당정치를 위해서는 지나치게 한편으로 쏠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반대 세력도 있어야 한다. 대체세력이 있어야 책임정치를 할 수 있고, 견제와 비판도 가능하다. 그러나 탄핵 찬반으로 여야 진영을 짜 건강해질까.

지금 형세로는 진보진영의 장기집권일 수 있다. 안철수 전 대표의 말처럼 전체 지형이 바뀌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다. 기존의 보수는 소수 극우세력으로나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 구도다.

이번 사태의 책임은 박 전 대통령과 집권여당에 있다. 보수의 이념이 잘못한 건 아니다. 그런데도 박 전 대통령과 친박 정치세력의 공격적 태도로 기존의 보수세력 전체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철저히 반성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용서도 있고, 다음도 있다. 잘못한 게 없다는데 무엇을 용서해주나. 친박세력이 걸림돌이다.
문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털어내는 문제다. 일부 친박 정치인도 함께. 사실 박 전 대통령에게 ‘차기’는 없다. 그런데도 왜 정치적으로 내려놓지 못할까. 사법적으로 다투고 있다는 점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헌법재판소 결정문에서 보듯 진실에서 멀어질수록 결과는 더 나빠지는 게 아닌가. 구속 결정, 재판, 사면 여부를 따져봐도 수긍하기 어렵다.

사실 현실적인 이해가 걸려 있는 건 측근들의 정치적 진로다. 지금 와서 물러서면 그들은 정치를 그만 둬야 한다. 박정희 향수를 업으면 적어도 총선에서는 버틸 여지가 생긴다. 더군다나 다음 대통령이 진보 진영이라면 대결의 각을 세우기에 유리하고, 보수 본류를 차지할 수 있다는 욕심을 부릴 만도 하다.

하지만 이런 구도로는 확장성이 없다. 친박세력이 야당을 즐기는 데나 적당할 그림이다. 어릴 적 젖니를 빼면 지붕에 던졌다. 까치가 헌 이를 물고가 새 이를 가져다 준다는 전래동화를 들려주며 아이들을 달랬다. 썩은 이는 뽑아야 새 이가 난다. 이가 흔들리는데도 그대로 두면 덧니가 날 수밖에 없다. 그 썩은 이가 새 이가 나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호남의 야당 지지자들은 전략적 투표를 해왔다. 김대중 정부 말기 호남 정권의 연장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자 영남 출신 후보를 물색했다. 노무현 후보에게 광주에서 몰표를 몰아줘 후보를 만들고, 대통령으로 세웠다. 기분대로 투표해봤자 내 표는 사표(死票)가 되고, 만년 패배를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보수진영에서 안희정 지사나 안철수 전 대표를 대안으로 거론하는 것도 그런 전략적 선택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략적 투표는 개별 목소리를 낮출 때 가능하다. 친박세력이 악을 쓰고, 대립각을 세우는 한 하나로 뭉치기는 어렵다. 중간 세력은 죽는다. 문재인 대세론을 지원하는 꼴이다. 결국 실망한 보수 지지자들은 판을 뒤집을 수밖에 없다. 꼴통을 배제한 새로운 보수를 건설하는 것이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jink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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