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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시대를 열겠다는 그들에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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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호 06면

연극 ‘왕위 주장자들’ 연습실에서

연극 ‘왕위 주장자들’ 연습실에서

“과거에 난 쓰라린 고통을 당했죠. 내가 믿었던 진영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했어요.(…) 지금까진 개인적인 모욕으로 지나갔지만, 만약 앞으로도 날 의심한다면 그건 국가적 재난으로 여길 거요.(…)내 안에는 따뜻하고 강력한 확신이 있소. 이 환난의 시대에 이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요.”

금주 막 오르는 연극 #‘왕위 주장자들’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누군가의 말일까? 아니다. 서울시극단 창단 20주년 기념작 ‘왕위 주장자들’(3월 31일~4월 23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습실에서 듣게 된 대사다. ‘근대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노르웨이의 헨리크 입센(1828~1906)이 집필한 지 154년 만에 국내 초연되는 ‘왕위 주장자들’은 아사리판 같은 대선 정국을 한발 떨어져 냉정하게 조망할 수 있는 흥미로운 무대다. 14일 공개된 1막 연습을 보고 있자니, 군웅이 할거하던 13세기 중세 노르웨이의 치열한 권력다툼, 여러 갈래 인물들의 혈통과 신앙, 배신과 기만이 중첩되는 스토리라인이 마치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한 장면을 보는 듯 박진감이 넘쳤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켰던 ‘사회의 기둥들’에 이어 입센 연극에 재도전하는 김광보 예술감독은 “대선과 맞물려 의도적 선택이 아니냐고들 하는데 우연의 일치일 뿐, 3년 전 서울시극단 부임 당초부터 고려해온 작품”이라면서도 “처음 대본 받았을 때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우리 시대와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나 감탄했다”고 밝혔다. “현재 우리 사회에 맞는 작품이지만 더 매력적인 건 캐릭터예요. 강한 자기 확신을 가진 호콘 왕과 권력을 탐하면서도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스쿨레 백작, 둘 사이의 갈등을 부채질하는 니콜라스 주교의 심리 상태가 너무나 매력적이죠.”

‘세계에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공연되는 작가’라는 입센은 흔히 ‘인형의집’ ‘유령’ 등 사회문제극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런 출세작들의 밑거름이 된 초기작 ‘왕위 주장자들’은 역사극이다. 국내 유일의 입센 연구자로 작품을 번역한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는 “입센의 집필 당시 덴마크와 스웨덴의 속국이었다가 비로소 독립한 노르웨이에는 자국어 연극이 전무한 상태였다”면서 “빵도 못 사먹는 가난 상황에서도 지식인들은 자국어로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왕위 주장자들’은 당시 별볼일없던 노르웨이 역사를 다시 보게 한 작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 역사극답게 스펙터클한 왕위쟁탈전을 그리기보다 욕망과 의심 사이를 줄타기하는 인물들의 내면 묘사가 차라리 심리극에 가까워 보인다. 각색을 맡은 고연옥 작가는 “강한 권력욕을 가진 3인의 각개전투를 통해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 의도치 않게 한국 사회를 연상시킨다”면서 “하지만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냉소하는 게 아니라 핵심 키워드는 의심이다. 우리는 매순간 내가 옳은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다. 자기 확신이 강하다고 강인한 사람이고 자기를 의심한다고 나약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김광보 연출도 “자기 확신이 강한 호콘은 결국 스스로를 신이라 믿게 되지만, 그런 인물이 일반 민중의 바램을 이뤄줄지 의문이 든다”며 “절망의 시대가 지났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제시하는 희망이란 게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호콘 왕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햄릿형 인간’ 스쿨레 백작이다. 평생을 갈망하던 왕좌에 편법으로 오르고 나서 추종자들을 격려한 뒤 혼자 남겨지자 “저 무식한 것들과 하루종일 붙어 앉아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승리와 성공을 확신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니 괴롭다”면서 스스로 “내가 어떻게 이겼을까?” 자문하는 그의 모습에서 가식 아래 숨겨진 나약한 인간의 민낯을 본다. 저마다 겉으로는 ‘희망’과 ‘행복시대’를 외치고 있는 ‘왕위 주장자’들의 속마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서울시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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