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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종횡무진 에너지 가득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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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26면

7시간짜리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러닝타임 7시간짜리 연극이 나와 화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6 공연예술 창작산실 우수신작으로 공연 중인 극단 피악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9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이다.


지난 11일 이 작품을 관극했다. 오후 2시부터 3시간 30분 동안의 1부, 저녁 7시부터 또 한 번 3시간 30분 간의 2부를 보아야 했다. 우선 각색과 연출을 맡은 나진환 성결대 교수의 열정과 7시간 동안 종횡무진 열연을 펼친 배우들의 에너지에 찬사를 보낸다. 대개의 공연이 2시간 전후로 이루어지는 것을 감안한다면 공연 시간만으로도 기획 측면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침착하면서도 광대스러운 #정동환의 열정적 연기 돋보여 #너무 많은 대소도구와 장면전환 #과다한 장치와 함께 과유불급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국내에서 연극으로 공연된 적이 거의 없다. 서양인들의 정신사와 종교 문화에 뿌리 깊은 도스토옙스키(1821~81)의 죄와 벌에 대한 인식을 피부로 느끼도록 구현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나진환 연출은 이를 7시간짜리 대작으로 풀어내는 어려운 도전에 나섰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21세기 들어 가장 길었던 공연은 아마도 페터 슈타인(Peter Stein)이 연출한 ‘파우스트’ 1, 2부일 것이다. 2000년 독일 하노버 엑스포(EXPO)를 기해 제작된 이 공연은 21시간짜리로, 관객들은 매일 3시간씩 일주일 내내 ‘특설무대’를 찾아야 했다. 이와 비교한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꼭 긴 공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에서 보기 드문 기획인 것은 맞다.

11일 공연에서 2부 관객은 1부에 비해 좀 줄었지만, 그래도 1, 2부를 함께 본 사람이 꽤 많아 보였다. 상당히 어려운 작품이라 좀 의외였다. 하여 관객의 부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러시아, 아니 세계의 대문호인 도스토옙스키의  이 작품은 그 이름만 들어본 사람도 있고 실제 읽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연극 애호가들은 지적 호기심이 크기에 이런 어려운 고전을 원작 삼은 연극은 망한 적이 거의 없다. 이제껏 한국에서 공연된 ‘파우스트’가 별다른 예외 없이 ‘대박’을 쳐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연출자 나진환은 그간 도스토옙스키에 몰두해온 것으로 보인다. 2010년에 ‘악령’을, 2012년에 ‘죄와 벌’을 이미 연출했다. 전자는 알베르 카뮈의 각색본을 사용했지만 후자와 이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직접 각색도 했다. 『백치』(1868)도 있지만, 일단 이 세 대작이 집필된 순서는 『죄와 벌』(1866), 『악령』(1872),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9~80) 순이다. 집필된 순서대로 각색이 되어 공연되었다면 연출자로서는 한 작가의 성장과 발전에 따른 사상의 변화, 문체의 다양성 등을 파악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물론 세 공연을 모두 관극한 관객에게도 해당된다.

유럽의 정신문화사에 대한 고찰 있어야

도스토옙스키의 위의 세 작품을 극단 피악은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시리즈’라는 대주제로 묶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다.

연극에서 인문학적 배경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작품 선정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특히 연출가의 생명을 길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극단 피악의 ‘시리즈’는 의미있다 하겠다. 다만 유럽인들의 신정설(神正設), 혹은 호신론(護神論·theodicy)을 우리가 깊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은 짚어야겠다. 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이 창조되었고 신의 섭리가 궁극적으로 선(善)이라면 인간과 그들이 사는 세상엔 악이 존재하지 말아야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유럽의 철학자들, 예술가들의 정신적 고뇌와 갈등은 컸고, 클 수밖에 없다. 결국 그들은 악의 존재도 신의 섭리라는 해결책을 마련했고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작품은 바로 이러한 작가적 고뇌와 갈등의 산물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바꿔 말해 유럽의 정신문화사를 공유하지 못한 우리로서 이런 작품들에 대한 이해는 창작자, 수용자 공히 자칫 피상적일 수도 있겠다는 말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작가 자신의 에필로그와 함께 4부로 구성된 방대한 소설을 소화하기 위해 서사적 기법을 적극 활용했다. 무대 실현의 측면에서 프로그램에는 ‘씨어터 댄스(Theater-Dance)’라는 스타일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 실체는 분명치 않다.

1부는 방탕과 호색 탓에 거의 악의 화신으로 그려진 표도르의 첫아들 드미트리(김태훈)에게, 2부는 무신론자이며 냉소적 성격의 차남 이반(지현준)에게 많이 할애되어 있다. 특히 드미트리 역은 다성(多聲)적인 캐릭터를 잘 드러내는 액션이 많아 공연을 지루하게 하지 않는 미덕은 있었으나 오버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작품의 중심을 잡아준 배우는 도스토옙스키 및 해설자, 조시마 장로, 대심문관과 이반의 섬망증에 나타나는 식객 역을 소화한 정동환이었다. 그의 연기는 역할에 따라 침착했고, 정열적이었으며 광대스럽기도 했다.

번역투 대사가 연기 어렵게 할 때도

연극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동시대성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사용되는 거울 패널로 극대화되었다. 표도르의 세 아들, 아니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까지 네 아들의 욕망·사랑·갈등·죄의식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것이며 그것들을 거울에 비추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한 연출 의도 역시 분명했다. 스메르자코프에 의해 수행되지만 결국은 형제들도 정신적으로, 혹은 무의식 속에서 함께함으로써 결코 자유롭지 못한 ‘부친살해’가 작품을 드라마가 되게 한 축이다.

부친살해는 상징적으로는 과거를 죽이는 것이다. 과거를 죽이고 새로이 태어나는 상징성은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근간인 ‘죄’와 ‘벌’에서 현실적인 벌이 아니라 속죄의 행위로 보여진다. 연출의 근본적 핵심도 여기에 놓여있다.

7시간 공연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한국 연극의 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무래도 과유불급이었다. 관객의 주목을 오랫동안 붙들기 위해서였을지 모르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이 세계적 작품의 철학적 전언에 침잠케 하기보다는 너무 많은 대소도구, 너무 많은 장면 전환, 너무 많은 움직임, 너무 많은 연극적 장치에 눈을 두게 했다. 또한 3년이 소요됐다는 대작의 각색에 힘이 들었겠지만 대사에 남아 있는 번역투가 배우들의 연기를 어렵게 할 때도 있었다는 점 역시 지적하고 싶다.

김미혜 연극평론가·한양대 명예교수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98년부터 한양대 연극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사무국장, 한국연극학회장, 국립극단 이사를거쳐 현재 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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