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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졸라의 탱고처럼 … 사람에게 말 거는 음악 찾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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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기돈 크레머는 지난해 영국 BBC 뮤직 매거진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20’에서 살아있는 연주자 중 가장 높은 순위(6위)에 올랐다. [사진 크레디아]

기돈 크레머는 지난해 영국 BBC 뮤직 매거진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20’에서 살아있는 연주자 중 가장 높은 순위(6위)에 올랐다. [사진 크레디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70)는 말하자면 세계적 콩쿠르의 ‘그랜드슬래머’다. 1967년 퀸엘리자베스 2위, 1969년 파가니니 1위, 몬트리올 2위, 1970년 차이콥스키 1위에 올랐다. 60년대 후반부터 집중적으로 명문 대회를 공략해 모두 입상하고 차이콥스키를 마지막으로 콩쿠르에서 졸업했다. 그 뒤론 실전 경력을 화려하게 시작했다. 빈·베를린·런던 등 최고의 무대, 유명 지휘자들의 협연, 권위 있는 음악 축제에 크레머의 이름이 늘 들어있었다.

5월 한국서 공연하는 기돈 크레머 #세계적 콩쿠르 석권 ‘그랜드슬래머’ #현대 작곡가·작품 발굴로 명성 #20년 전 꾸린 젊은 연주자 앙상블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함께 내한

독특한 점은 지금 그를 콩쿠르 출신 바이올리니스트로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누군가 “기돈 크레머가 왜 세계적으로 유명한가” 또는 “기돈 크레머의 음악계에서 위치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콩쿠르 우승자”라고는 대답하지 않는 편이 낫다. 크레머를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와 구별 지은 결정적 활동은 새로운 작곡가와 작품 발굴이다.

 사진 크레디아

사진 크레디아

아스토르 피아졸라, 아르보 패르트, 필립 글래스, 알프레트 슈니트케…. 20세기 작곡가들의 이름이 익숙하다면 상당 부분 크레머 덕분이다. 크레머는 세계적으로 한창 주목받던 시기에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찾아내 녹음하고 무대에서 연주했다. 스타 바이올리니스트의 일반적 행보와는 달랐다. 새로운 곡을 발굴해 소개하는 건 경력에 위험할 수도 있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 성공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됐다. 새로운 곡을 알아보는 특별한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현대 작곡가가 난해한 작곡으로 청중과 멀어질 때 크레머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작품들을 잘 골라냈다.

크레머와 e메일 인터뷰는 발굴가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작곡가와 작품들을 어떻게 찾아낼까. “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말을 거는 음악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연주하고 연구한다.” 다소 모호한 말이지만 “작곡가를 위해 작곡하는 작곡가의 작품은 배제한다”는 답만큼은 뜻이 확실했다. 작곡 기술의 진보만을 추구하는 작곡가들에 대한 비판이다. 예를 들어 피아졸라의 탱고는 크레머의 기준에 부합한다. 그는 ‘아름다움(beauty)’을 강조했다. “피아졸라의 아름다움과 향수(鄕愁)에 대한 감각은 슈베르트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크레머가 2000년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계’와 비발디의 ‘사계’를 한 악장씩 번갈아 연주해 녹음한 음반은 지금도 인기가 많다.

최근에 그가 ‘밀고 있는’ 작곡가는 미에치스와프 바인베르크(1919~96, 폴란드)다. 크레머는 전곡 녹음, 초연 등으로 바인베르크를 열심히 소개하고 있다. e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작곡가만의 독특한 점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바인베르크는 감정적이고 진지하고 깊은 음악으로 감동을 준다. 최대한 많은 이가 그 음악을 들었으면 한다”고 소개했다.

그가 늘 새로운 작곡가·작품을 찾게 되는 동력은 뭘까. 크레머는 “이유는 단순하다. 음악가와 음악 애호가의 상상력을 확장하고 싶은 열망이다. 재능 많은 창작자들이 더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도록 돕고 싶다”고 설명했다.

 사진 크레디아

사진 크레디아

새로움을 찾는 크레머의 행보는 기존의 정해진 틀에서 벗어난다. e메일 인터뷰에서도 그는 관례·틀 등을 의미하는 ‘루틴(routine)’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1997년 젊은 연주자들을 모아 앙상블 ‘크레메라타 발티카’를 만든 것도 “모든 관습을 거부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피하고 싶은 음악계의 관습은 다양하다. “오케스트라가 단지 돈만 벌기 위해 연주하는 것” “똑같은 작품만 연주하면서 연주자 스스로 한계를 정하는 것” 등이다. 그는 젊은 연주자들에게도 바인베르크 같은 새로운 작곡가의 작품을 골라준다. 크레머는 “젊은 연주자들에게 ‘새로운 작곡가 선보이는 걸 두려워하지 말라. 혁신적이고 진실하면 된다’는 조언을 하곤 한다”고 했다.

크레머는 1년 중 절반을 ‘크레메라타 발티카’ 활동으로 보낸다. e메일 인터뷰에서도 ‘나의 장미’라고 칭했을 만큼 힘을 쏟는 악단이다. 창단 20주년을 맞아 한국에도 함께 온다. 5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릴 이 공연에서 그는 1685년생 바흐와 1921년생 피아졸라의 협주곡을 연달아 연주한다. 둘 사이 차이가 230년이다. 독특한 프로그램이지만 크레머에게는 자연스러운 선곡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생각해보면 230년은 아주 짧은 기간이다. 그러므로 모든 음악은 나에게 현대음악이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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