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매거진M] '로건'은 부성애로 완성한 21세기 안티히어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부성애로 완성한 21세기 안티히어로

‘정말 이런 기분이구나.’ 로건의 말대로다. 막이 내리고 엔드 크레딧이 흐르며 음악이 나오는데, 이 영화 하나로 충분하다는 포만감이 몰려온다.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랴. 포스터도 이보다 완벽할 수 없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포효하던 야수는 딸을 꼭 끌어안고 달리는 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울버린의 여섯 날 클로는 ‘브이 포 벤데타’(2005, 제임스 맥티그 감독)의 가이 포크스 가면을 대신할 새로운 상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비장한 운명을 짊어진 안티히어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저항의 안티히어로를 완성한 ‘로건’의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2~1974년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은 히어로 만화의 전환점이었다. 이전까지 히어로들은 성조기를 앞세우고, 정부와 연합하고, 대통령과 악수하며, 언제나 선한 편이라 여겨졌지만 이때부터는 달랐다. 예컨대 캡틴 아메리카는 대통령이 국가를 사유화하려 한 사악한 무리의 지도자였음을 알고, 그 이름과 성조기가 연상되는 옷을 내팽개치고 재야로 나간다.

‘정의가 지배하는 문명국’이라 여겨졌던 미국은 법도 질서도 없는 야만의 사회, 즉 강한 검과 무서운 흑마법이 곧 권력으로 인정되는 판타지물의 사회와 똑같이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야만인 코난』 (로버트 E 하워드 지음)과 같은 만화가 널리 읽혔다.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 출신이지만 도시 한복판에서 가족을 잃은 ‘퍼니셔’와 정부의 비밀 실험에 이용돼 힘을 얻고 과거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 ‘울버린’. 두 명의 안티히어로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이들은 초인의 ‘혈통’도 아니었고, 부단한 ‘노력’을 통해 경지에 이른 히어로도 아니었다. ‘전쟁놀이’에 끌려가 인간성을 짓밟히고 가족을 빼앗겼으며 기억을 잃은 희생자였다. 이전의 히어로들과 달리 그들은 ‘분노’했고, ‘복수’를 맹세했으며, 악을 멸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 사임 이듬해인 1975년, 울버린은 다국적 멤버로 재결성된 엑스맨의 핵심 멤버가 됐다. 2000년대 이후에는 영화를 통해 ‘혐오’와 ‘종교적 광기’에 맞서 싸우기 시작해 고독한 무사, 암살자, 더러운 일을 도맡는 해결사, 엑스맨의 최종 병기로 진화해 갔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수퍼 히어로 만화들은 히어로들에게 자녀를 붙여 주고, 그들에게 ‘아버지’의 속성을 부여하는 변화가 생겨났다. 다음 세대에 대한 염려는 21세기 히어로 만화의 화두 중 하나였다. 슈퍼맨, 배트맨, 울버린, 케이블, 루크 케이지, 데드풀, 앤트맨, 스파이더맨 모두 보호해야 할 자식을 갖게 됐고 부모로서 고민에 빠진다. 특히 마블의 안티히어로들은 하나같이 외동딸을 둔 아빠로 묘사되면서, 딸을 지키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이 21세기 안티히어로의 새로운 속성이며, ‘로건’은 이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 영화의 원작 만화를 따져 보면, 힘을 잃어 가는 늙은 로건의 분투나 잰더 라이스(리처드 E 그랜트)가 어린 뮤턴트들을 자유의지조차 판단 못하는 무뇌 병기로 조작하려 애쓰는 모습, X-23(로라)의 탈출기 등은 『울버린:올드맨 로건』(사진) 『X-23:순수의 상실』을 기반으로 한다. 뮤턴트가 멸망한 미래는 『울버린:올드맨 로건』 『하우스 오브 엠』 『엑스맨:메시아 콤플렉스』의 것을 가져왔다.

관련기사

특히 ‘한 노인이 뮤턴트의 마지막 희망인 소녀를 데리고 먼 도망의 길에 올라 자신의 복제 인간과 결전을 벌이고, 끝내 소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큰 이야기 줄기는 늙은 전사 케이블과 구세주 소녀 호프의 이야기를 그린 ‘메시아’ 3부작 『엑스맨:메시아 콤플렉스』 『엑스포스/케이블:메시아 워』 『엑스맨:세컨드 커밍』의 것을 따왔다. 자신의 DNA가 복제 병기를 만드는 데 악용당하고, 여태 몰랐던 딸의 존재를 알게 되고, 부성애에 눈뜨고, 자기 곁에서는 결코 딸이 행복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딸을 떠나보내는 이야기는, 브라이언 포센과 제리 더갠의 만화 『데드풀』 시리즈의 큰 줄기를 따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실은 영화 ‘로건’의 울버린 안에는 울버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진화한 또 다른 두 히어로, 케이블과 데드풀도 함께 들어 있는 것이다.

‘혐오’와 ‘종교적 광기’와 ‘부정한 권력’에 맞서, 외동딸로 표현되는 ‘반드시 지켜야 할 소중한 자식’의 미래를 위해 온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싸우는 아버지. ‘너는 그놈들 뜻대로 살지 마.’ 그 한마디로 울버린은 그렇게 안티히어로의 역사를 완성하고 떠난다.

이규원 그래픽 노블 번역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