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고스펙 여자라서 미안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전수진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수진정치부 기자

전수진정치부 기자

‘하향결혼’에 대찬성이다. 이렇게 혁신적이고 비(非)한국적인 개념을 국책연구기관에서 만들어냈다니. 이 나라에 착실히 세금 내고 살아온 보람을 느낀다. 이 보고서를 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원종욱 전 선임연구위원은 기립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브라보.

그의 주장은 “여자가 너무 잘나면 결혼을 안 하니까 못나게 만들어 하향결혼 시키자”로 요약된다. 발상의 빈곤함은 가엾지만, 여기엔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단초가 있다. 우리 여성들은 ‘3고(고학력·고신장·고임금)’ 남성을 찾느라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국책연구기관에서 하향결혼이라는 혁신적 선택지를 제공한 것이다. 대다수의 3고 남자들은 어차피 어리고 예쁘고 부모님 재산이 많은 여성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아니라고? 위선 떨기에 인생은 짧다. 이제 여자들도 발상의 전환을 이룩할 때다. 남성들이 꿈꾸는 3고 여성이 되어 잘생긴 연하 남자를 찾는 거다. 돈이야 우리가 벌면 되니 부모님 재산이 많을 필요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며, 출산지도까지 그려대며 낑낑대는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획기적 방안이 아닐 수 없다.

단, 하향결혼이 성공하려면 조건이 있다. 기존의 성역할은 쓰레기통에 갖다 버릴 것. 기꺼이 ‘경력단절남’이 되고, 출근 전엔 5첩 반상을 차리며, 가사노동의 99%를 담당해야 한다. 외모 가꾸기는 기본이요, “어디 남자가 조신하지 못하게”라는 잔소리도 감내해야 한다. 그럼 여성들도 출산할 마음과 여력이 더 생길 터이니, 출산율 상승에도 혁혁히 기여할 수 있겠다.

지난 8일 국제여성의 날 기념 퍼레이드에 ‘동일민낯’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는데, 개인적으론 반대다. 이왕이면 남녀 모두 예쁜 게 좋다. “화장 안 했냐?”고 면박 주는 무개념 남자에겐 “너님의 눈썹이나 정리하삼”이라 응수하는 멋진 세상이 조속히 오길 바란다. 남성용 화장품도 획기적으로 발전해 침체된 내수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게다.

이왕 도발을 시작한 김에 이런 제목을 던져본다. ‘남자가 꼭 필요해?’ 뉴욕타임스가 자랑하는 스타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의 책 제목(Are Men Necessary?)이다. 남자는 물론 필요하다. 원래 남자란 아름다운 존재다. 지금 우리 주변에 그런 남자가 많지 않을 뿐. 그 책임은 우리 여자들에게도 있다. 지금 이 나라는 고스펙 여자들에게만 저출산 책임을 묻는 이상한 나라다. 친애하는 여성들이여, 거룩한 발상의 전환을 이룩하자.

전수진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