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들린 살림, 적금·보험까지 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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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에서 자영업을 하는 金모(43)씨는 최근 급한 가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5년간 부었던 암보험을 해약했다.

생활비를 쪼개 매월 꼬박꼬박 부은 보험료가 5백만원 정도 되지만 중도 해약 수수료를 제하고 金씨가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3백5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장 닥칠 돈 고생을 면하기 위해 金씨는 손해를 무릅쓰고 해약을 택했다.

생활고로 적금이나 보험을 해약하는 서민들이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올 들어 지난 5월 말까지 조흥.우리.제일.외환.신한.한미.하나 등 7개 주요 시중은행의 월 평균 적금 해약 건수를 집계한 결과 지난해의 월평균에 비해 은행별로 1.5~57.1%가 증가했다"고 12일 밝혔다.

하나은행은 매달 평균 2만5천3백여건의 적금이 해지돼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8% 늘었고, 한미은행과 조흥은행도 각각 15.8% 및 14.5%씩 적금 해약건수가 증가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돈 쓸 곳은 많은데 경기 침체로 벌이가 시원치 않자 서민들이 애써 모으던 적금을 대거 해약하고 있다"며 "이런 추세는 경기가 회복세를 보일 때까지 이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금감원이 23개 생명보험사들의 2002회계연도(2002년 4월~2003년 3월) 영업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올 들어 가입한 보험을 해지하는 사례도 크게 늘고 있다.

전체 보험료 가운데 장기 연체 또는 계약해지로 찾아간 해약금이 차지하는 비율(효력상실 해약률)이 전년도의 13.9%에서 14.8%로 약 1%포인트 높아졌다.

효력상실 해약률은 외환위기 발생 이듬해인 1998회계연도에 29.4%로 정점을 기록한 뒤 해마다 낮아지다가 올 들어 다시 오름세로 돌아섰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가계소득 감소로 보험료를 장기간 내지 못해 계약이 자동해지되거나 가계대출과 카드빚 상환 등을 위해 계약을 스스로 해지하는 보험 가입자들이 늘고 있다"며 "경기회복이 지연되면 해약률이 계속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험개발원과 업계에 따르면 2003회계연도 이후 지난 4월과 5월의 월평균 해약건수는 84만3천9백여건으로 전년도의 월평균보다 11.9% 늘어나 보험해약률의 지속적인 상승을 예고하고 있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생명보험은 선진국들의 예를 볼 때 경기 침체국면에서 금융상품들 가운데 해약순서가 가장 늦은 상품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해약률 상승은 가계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봉수.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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