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낸드플래시 ‘삼성 제국’ 흔드는 도시바 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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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용 반도체 ‘낸드플래시’ 시장이 격변하고 있다.

기술력 앞선 삼성전자 독주 체제 #도시바 매각 결과 따라 투톱 재편 #대만 훙하이 등 4~5곳 경쟁 치열 #모바일·사물인터넷 수요 계속 급증 #“중국 인수가 한국에 최악 시나리오”

3차원(3D) 낸드플래시 기술을 앞세운 삼성전자의 독주 체제는 더 심화됐다. 2위 도시바를 차지해 ‘1강’ 삼성전자에 대항하기 위한 한국·미국·대만·중국 기업의 경쟁도 달아오르고 있다. ‘새로운 금광’으로 불리며 무섭게 팽창하는 낸드플래시 시장은 도시바 인수전에서 누가 축배를 드느냐에 따라 또 한번 지각 변동을 겪을 전망이다. 낸드플래시는 전원을 껐다 켜도 데이터가 날아가지 않아 저장용 메모리로 불린다. 모바일 기기와 사물인터넷(IoT)이 확산하면서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이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지배력이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8일 시장조사기관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점유율 37.1%로 1위를 유지했다. 한 분기 사이에 매출이 19.5% 늘어나 44억7390만 달러(약 5조1444억원)를 기록했다. 매출이나 시장 점유율 모두 이 회사가 낸드플래시 사업을 시작한 2002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2위인 도시바는 시장점유율이 18.3%로 떨어지며 삼성전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삼성전자의 질주는 3D 제조기술에서 비롯된다.

메모리셀을 아파트처럼 수직으로 쌓아서 용량을 늘리는 방식인데 삼성전자는 최고 기술력을 자랑한다. 3D 공법은 사실 도시바가 처음 고안했다. 평면 낸드플래시에 비해 같은 부피에 훨씬 많은 용량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고, 데이터 처리 속도도 더 빠르다는데 착안했다. 막대한 용량의 서버가 필요한 데이터센터나 갈수록 저장공간이 많이 필요한 스마트폰 등에서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 낸드플래시 시장이 지난해 3분기에서 4분기 사이에만 17.8% 성장한 건 이 3D 낸드플래시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게 주된 이유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막대한 시설 투자와 연구개발(R&D)을 앞세워 3D 낸드플래시 기술에서 경쟁업체들에 2~3년 앞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2위 도시바의 시장점유율이 빠르게 떨어지는 것도 이 3D 낸드플래시 투자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이세철 NH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삼성전자를 제외한 나머지 2~5위권 업체들은 기술력이나 시장점유율이 사실상 엇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며 “삼성전자가 벌려놓은 기술 격차를 짧은 시간에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독주 체제가 도시바 인수전의 결과에 따라 투톱 체제로 바뀔 수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시장 점유율이 10% 안팎인 3~5위권 낸드플래시 업체가 도시바를 인수하면 시장 점유율은 단숨에 30% 수준으로 뛴다.

당초 “최대 20%미만의 지분을 팔겠다”던 도시바가 최근 “메모리반도체 사업을 통째 팔겠다”고 입장을 바꾸면서 인수 경쟁은 한층 달아 올랐다. 송용호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기존 낸드플래시 업체들로선 공장을 증설하지 않고 시장 점유율을 늘리는 유일한 방법이 인수합병”이라며 “공급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할 가능성 때문에 공장 증설에 조심스러운 반도체 업체들로선 도시바 인수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 인수 금액이 25조원대로 높아지면서 합종연횡을 위한 움직임도 분주하다. 가장 적극적인 회사는 폭스콘을 자회사로 둔 대만의 훙하이다.

업계에서는 훙하이가 SK하이닉스 또는 대만의 반도체 위탁생산업체 TSMC 등과 손을 잡고 인수전에 참여할 거란 소문이 돌고 있다. 홍하이 외에 낸드플래시 시장 3위인 웨스턴디지털도 유력한 인수 후보로 꼽힌다. 이 회사는 이미 자회사 샌디스크가 도시바와 손잡고 낸드플래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만큼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란 평가를 받는다. 중국 본토 업체도 최근 출사표를 냈다. 지난해 도시바 백색가전부문을 약 500억엔(5000억원)에 사들인 중국 메이디그룹이다. 위안 리취 메이디홀딩스 부총재는 8일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사내에 도시바전략팀이 있다. 도시바반도체 사업에 관심이 있다”고 확인했다.

인수전의 변수는 도시바의 기술력과 일본 여론의 향배가 될 전망이다. 도시바에 군침을 흘리는 업체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도시바의 3D 낸드플래시 기술이 어느 수준이냐”는 것이다.

SK하이닉스 측이 “일단 실사를 통해 기술력을 검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로선 도시바의 3D 낸드플래시 기술력이 자사와 큰 차이가 없다면 엄청난 돈을 들일 필요가 있겠느냐는 입장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의 견제로 도시바가 중국이나 한국 기업에 넘어가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돈은 많고 기술은 없는 중국이 도시바를 사들여 단숨에 메모리반도체 기술을 따라잡게 되는 것”이라며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산업을 견제하는 일본 정부로서는 SK하이닉스에 도시바를 넘겨주는 선택을 쉽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시바 인수를 위한 입찰은 이달 30일 마감된다.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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