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있는 그림] 이반 푸니 '종합 음악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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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꽝스런 모자와 옷차림, 심각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콧수염이 찰리 채플린 주연의 영화 '방랑자'(1916년)를 떠올리게 한다. 채플린이 바이올린을 들고 가뿐하게 거리를 누빈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첼로.피아노.기타를 한데 합친 '종합 악기'를 들고 뒤뚱거리다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다. 허공을 연상케 하는 하늘색 배경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채플린의 불안감을 더한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오페라 작곡가의 손자, 첼리스트의 아들로 태어난 이반 푸니(1892~1956)의 '종합 음악가(Synthetic Musician)'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원맨 밴드'쯤 된다.

드레스나 조끼.넥타이의 울긋불긋한 색깔은 이질적인 악기군의 조합이 빚어내는 음색만큼이나 다양하다. 공중에 떠있는 짙은 회색의 피아노 다리, 기타의 목부분에 달린 줄감개, 첼로의 몸통을 그린 곡선…. 흰색 장갑을 낀 오른손에 들려 있는 활은 대위법적 전개로 펼쳐지는 이들 다양한 악기의 조합이 결국 하나의 현악기임을 말해 준다. 활과 X자 모양으로 대치되는 가늘고 긴 막대는 결국 '대형 첼로'의 지판(指板)이다. 여기에 여러 악기의 파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갈기갈기 찢어지긴 했지만 연미복차림인 것으로 보아 주인공은 얼마 전까지 오케스트라 단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길거리를 전전하면서 광대놀음과 카드 마술까지 서슴지 않는 영락없는 '거리의 악사'다. 피아노 두껑 위에 보이는 카드(조커)가 이를 암시한다. 굳게 다문 입과 지그시 감은 두 눈으로 보아 명상에 잠긴 것 같다.

푸니가 베를린에서 보냈던 20대 초반은 이 방랑악사처럼 고독했다. 이 그림은 피카소의 '기타를 든 광대'(1918년), 더 나아가 종합 입체파에 대한 오마주인 동시에 작가 자신을 영혼의 방랑자로 그려낸 자화상이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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