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년중앙] "수리를 희생시킬 수 없다" 절규하는 사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2면

일러스트=임수연

일러스트=임수연

75화

공격당한 벙커 3

우주에서 대기 상태로 있던 시즈들이 갑자기 벙커로 날아와 충돌했다. 마치 어차피 죽을 목숨인 볼모들을 직접 죽이지 않고 공포로 죽이려는 것 같았다. 비열한 전술이었다. 시즈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우주는 오로지 시즈들 뿐이었다.

“우리도 공간이동 시켜주면 안되나? 아까 부상입은 네피림을 공간이동 시켰잖아?”
사비는 조심스러웠지만 내심 절박했다.
“자기 종족을 우선 구조하겠지. 뭐. 벙커가 이거 하나만도 아닐 테고. 많은 벙커에 많은 네피림이 있지 않겠어?”
자포자기한 듯한 마루도 속마음은 절박했다.
모나는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골리 쌤도 별말 없었다. 그때 네피림 하나가 다가왔다.

“우리를 공간이동 시켜주세요.”
어쩐 일인지 모나가 나섰다. 어른으로서 책임감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네피림은 단호했다.
“수리가 지금 매우 불안한 상태다. 공간이동 할 경우 아다마가 변질하거나 파괴될 수 있다. 수리를 두고 너희라도 구조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다. 우리는 곧 떠날 예정이다. 이 스페이스 셔틀은 일단 버리기로 했다.”
“그럼 수리를 버리고 가라는 말씀이세요? 수리만 두고 따라와라. 우리가 구조해주겠다? 이 말씀이시죠? 네네…참…별….”

마루는 마음이 꼬여갔다. 네피림은 아이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수리 친구로서 너희가 고민한다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수리를 두고 가도 저들은 수리를 죽이지 않아. 저들에게도 수리는 중요한 존재니까. 수리의 아다마가 자신을 살릴 거야. 수리를 두고 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모두 말이 없었다. 그런데 사비는 참지 못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사비의 찢어지는 목소리는 가뜩이나 불안한 벙커에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우리가 살던 곳에서도 그렇게 얘기했어요. 매일 듣던 익숙한 얘기죠. 친구에게 입시 정보를 공유하지 마라. 그 친구 때문에 네가 떨어질 수 있다, 시험 공부는 혼자 해라. 자칫 실수로 예상문제와 정답이 노출될 수 있다. 수업 노트를 절대 빌려주지 마라. 수업시간에 마냥 놀다가 시험기간에 잘 정리된 노트 빌려서 무임승차 하려는 친구는 배제해라. 학교폭력이 벌어지는 광경을 보면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마라. 그냥 지나쳐라. 쳐다본다는 것 자체로 위압감을 느꼈다며 고소할 수 있다. 학교 폭력에 끼어들지 마라. 직접 때리지 않아도 공범자가 되면 처벌받는다. 평판이 나빠져서 생활기록부에 안 좋게 기록될 수 있다. 친구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가만 있어라. 구조대에 전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구조대 전화 후 바로 빠져나가라. 학교와 경찰에서 이것저것 물어보느라 공부시간 뺏길 수 있다.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요.“

사비는 눈물 범벅이었다.


“난 이런 곳에서 살다 왔어요. 학교에 수 백 명의 친구들이 있지만 내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학교에 수 십 명의 선생님이 있었지만 나를 아껴주고 야단치는 선생님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외로웠죠. 친구가 필요했어요. 하지만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를 찾는 게 쉽지 않았어요.”
시즈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어졌지만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모두 사비의 말에 빠져 있었다.
“서로 사랑해주고 서로 배려해주고 서로 아껴주고. 그런 친구는 없었어요, 만약 어떤 친구가 사랑 하고 배려하고 아끼면 당장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 당했을 거예요. 왜냐고요? 자기들과 다르니까요. 공부 잘하고 부모들도 대단한 친구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배려하고 아껴줄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이 행복한가요?”
마루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피스솔져. 내 친구들이죠. 내 친구. 내 친구. 내가 어딜 가든 내가 무슨 일 하든 나와 모든걸 함께 할 친구니까요. 게다가 우리는 모험심 하나는 누구 못지 않았어요. 우리는 호기심을 갖고 추적하고 직접 발로 뛰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룬 이 모든 모험이 단지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무시당해도 되나요?”
골리 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요. 무시해도 좋아요, 우리 피스솔져는 우리의 방식대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아끼며 살 거니까요. 영원히.”
사비에게 다가온 모나가 사비의 어깨에 손을 가만히 얹었다.
“난, 친구들과 입시 정보를 공유할 거예요. 함께 공부하고, 수업 노트도 보여줄 거예요. 난 학교폭력이 벌어지는 광경을 보면 가서 나쁜 놈을 패줄 거에요. 그리고 무섭게 노려보며 ‘꺼져.’라고 말할 거예요. 내 친구가 맞으면, 그래요 발로 엉덩이를 뻥 차줄 거예요. 구조대에 신고하고, 병원에 함께 갈 거예요. 병실에 같이 있어줄 거예요.”
사비가 숨이 찬지 숨을 몰아 쉬었다.
“왜 이런걸 못하게 하죠? 난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피스솔져가 필요했던 거예요. 내 친구들 수리, 마루. 난 내 친구들 사랑해요.”

마루가 사비를 껴안았다. 서로 안고 울었다.
“그래서 수리를 두고 갈 수 없었어요. 친구는 이익을 위해 선택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수리의 아다마가 필요해서 그들이 데려간다면, 만약 아다마를 빼고 죽도록 방치한다면? 그땐 어쩌죠? 그땐 어쩌냐고요?”
사비가 울부짖었다.
“친구의 뇌가 인류 진화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또는 당신의 전쟁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친구를 팔아 넘겨요? 나 살자고 친구를 배신해요?”
사비는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는 말은 마세요. 그건 독재와도 같은 거잖아요. 그리고 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원치 않아요, 난 진화니 발전이니 이런 것 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당신들의 존엄성도 중요하게 생각하구요. “
모나와 사비·마루·골리 쌤은 수리를 따뜻하게 안고 있었다.
“수리의 아다마 버려주세요. 필요 없어요, 수리를 죽이면서까지 비밀을 파헤칠 필요 없어요. 난 살아있는 수리를 원해요.”
사비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벙커에는 꽤 많은 네피림이 들어와 있었다.

그때였다. 벙커 창문이 그만 날아가버렸다. 벙커 안으로 우주 폭풍이 몰려왔다.
“잘 붙잡아. 날아가지 전에, 날아가면 다시는 찾을 수 없어.“
마루가 소리쳤다.
“우리를 이동시켜 주세요.”
사비가 다시 사정했다.
“지금은 안돼. 이미 벙커는 망가졌어, 오염됐다고.”
네피림도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우주로 날아갈 것 같았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시즈들이 벙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이었다. 방금 사비의 연설을 들은 네피림들은 차마 아이들을 두고 떠나지 못하겠는지, 본인들도 위험을 무릅쓰고 떠나지 않았다.
쿵쿵쿵 벙커 안 쪽 문이 벌컥 열리며 아빠들이 나타났다.
“아빠. 아빠….”
사비가 소리질러 아빠를 불렀다.
“아빠….”
마루도 아빠를 불렀다.

수리 아빠는 수리의 상태가 좋지않다는 걸 발견하고 자신의 몸에 로프로 수리를 묶었다.
“어떻게 탈출하셨어요?”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여길 나가자.”
사비 아빠는 사비를, 마루 아빠는 마루를 챙겼고 모나는 골리 쌤과 함께 벙커를 나갔다.

네피림의 벙커는 어마어마하게 큰 항모급 우주선 내부에 있는 하나의 벙커 일 뿐이었다. 네피림은 일단 수리를 패닉룸에 데려갔다. 패닉룸은 간단한 처치가 가능한 은신처였다.
수리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마다의 진화 과정 중, 강제적으로 프로세스가 멈추는 바람에 뇌가 많이 손상된 상태였다. 수리 아빠는 절망한 표정으로 멍하게 수리를 쳐다 봤다.
“방법이 없을까요? 수리를 살릴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저 시즈들을 향해 몸을 던질 수도 있어요. 아니면 적의 근거지로 가서 적장의 목이라도 잘라버리면 됩니까?”
수리 아빠는 처절했다.
“방법이 없는건 아닙니다.”
네피림의 대답에 모두 술렁였다.

“다만, 수리를 치료하려면 우리의 고향 행성으로 보내야 하고, 우리의 의료체계에 따라 치료하면 수리는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네피림의 설명에 모두 경악했다.
“그럼 수리가 당신들과 같은 몸을 갖는다는 얘기인가요?”
사비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해줄 수 있단다. 수리의 몸이 너희들 인류와 똑같다 하더라도 수리의 뇌만큼은 인류의 뇌와 같아진다고 보장할 수 없다.”
네피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리 아빠는 대답했다.
“그렇게라도 해주세요. 지구로 돌아갈 필요 없습니다.”
수리 아빠가 소리질렀다. 네피림도 수리 아빠를 쳐다보았다.
“좀 전에 사비의 연설을 들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사비는 수리가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절대 버리지 않겠다고도 했죠.”
“친구요? 그냥 살려만 주십시오. 친구와 헤어지고, 가족 품에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어딘가에 수리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행복할 겁니다.”
수리 아빠는 흐느꼈다. 사비 아빠와 마루 아빠도 수리 아빠를 함께 껴안고 고통을 나누려 했다.

“그럼 저도 가겠어요.”
사비가 선언하듯 외쳤다.

“저도요.”
마루가 외쳤다.
“사비야!”

“마루야!”
사비 아빠와 마루 아빠가 외쳤다.
“저도 갑니다.”
이번엔 모나였다.
“저도 갈래요. 그깟 정교사가 뭐라고.”
골리 쌤도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