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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매창 ㅡ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ㅡ #16. 너는 나의 심복지우니라 (3)

중앙일보

입력

늦잠을 자고 일어난 허균은 매창에게 부안의 명승지를 한 곳 돌아보고 싶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좋다는 곳 말고 네가 좋아하는 곳 말이다. 그곳을 함께 걸어보고 싶구나.”

매창은 부안 땅 구석구석 자신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게 돌아다녔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막상 그중에 딱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저의 소견으로는 특별한 구경거리보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부안 땅 전체를 내려다보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부안의 진산, 상소산이라고도 불리는 성황산은 제가 자주 오르는 곳인데 눈앞이 탁 트이는 경치가 대감께서도 볼 만할 것이옵니다. 동으로는 동진강 건너 김제평야가 지평선까지 뻗어 있고, 북으로는 계화 땅 앞에 바다가 펼쳐지고, 서남쪽으로는 요새 같은 변산이 떠받치고 있지요.”

“그 말도 그럴 법하구나. 내가 견마잡이를 불러서 해 뜨자마자 찾아올 터이니 너는 내일 아침 사시까지 단장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거라.”

“말을 타고 가는 것보다 천천히 걸으면 한두 시간이면 족할 것입니다. 그리하시지요.”

“그래, 알았다. 너 좋을 대로 하자. 행선이라는 말도 있듯이 걷는 일이 참선이고 명상이라고 하더라. 이참에 나도 한번 길거리 구경하면서 걸어봐야겠다.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아니겠느냐?”

“아 참, 제가 한 가지 미처 생각을 못 한 게 있사옵니다. 대감의 체면 깎일 일 만들면 아니 되지요. 아무래도 사람들 눈도 있고 하니까 말을 타고 산 초입까지 가시지요. 거기서부터 걸어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말을 타고 가나 걸으나 크게 차이가 날 일은 아니나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꾸나. 말도 타고 걷기도 하고. 너와 같이 가기만 한다면 어떤 것이든 개의치 않으마.”

해는 오늘도 어김없이 하늘 높이 올라가 세상을 속속들이 비추었다. 아침이면 지난밤의 일이 먼 과거인 듯 아련하다. 바쁜 일정이 있는 날 매창은 절로 일찍 눈이 떠졌다. 마당을 직접 쓸고 나서 머리를 빗고 있을 때 허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매창아! 준비되었느냐?”

그는 대문 앞에서 큰 소리로 매창을 불렀다. 사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말에서 내려 매창을 안장에 태우고 자신은 매창 뒤에 올라탔다. 매창은 햇볕을 가릴 너울을 머리에 쓰고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허균은 눈이 부신 듯 찡그리며 준비해온 일산(日傘)을 매창에게 씌워주었다. 견마꾼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허균은 스스럼없이 매창에게 말을 걸며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를 구경했다. 대담한 사람이었다. 공공연하게 대낮에 기생과 나란히 놀러 다닐 수 있는 배짱은 자신감일까, 세상에 대한 무관심일까.

성황산 입구에 도착했을 때 햇볕은 더 따갑고 등줄기엔 땀이 흘렀다. 견마꾼에게 어디 가서 점심 먹고 서너 시간 후에 만나자고 일렀다. 허균은 매창 옆에 나란히 서서 숲에서 뿜어내는 나무 냄새를 코를 벌름거리면서 맡았다.

“이곳에 오니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구나. 가슴 한복판에 바람이 술술 통한다. 세상은 넓고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뭐든 모르는 것보단 아는 것이 낫겠죠.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저라면 알고나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 알아서 병이 되더라도 아는 것이 세상 이치를 깨치는 첫걸음이겠지.”

“이곳이 제가 매일 와서 거문고를 타는 금대이옵니다. 관아 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논밭이 펼쳐져 있어 먼 곳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감흥이 그럴싸하답니다.”

“그렇겠구나. 나도 언제 문득 들러 네가 여기서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싶구나.”

허균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서너 걸음 사이를 두고 매창이 따라 걸었다. 산길은 좁지만 가파르지 않아서 초행인 사람도 걸을 만했다. 한 식경이 지나자 걷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허균은 걸음걸이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는 흐트러진 걸음 따윈 괘념치 않는 듯했다. 숨이 찰 만큼 걷고 나니 나무 그늘이 우거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숲에 접어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앞이 탁 트인 곳이 나올 것이옵니다. 어느 날인가 해 질 무렵에 낙조를 보러 온 적이 있습니다. 해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붉은 기운이 온몸을 녹이는 것 같아 넋 놓고 바라본 적이 있지요.”

“그래, 이곳이 해가 지는 서녘이니 석양 무렵 오면 더 맛이 나겠구나.”

“너른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 암투 같은 건 접어두자, 제법 통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애탕끌탕 속 끓여봤자 그 일들이란 것이 작고 사소한 거지요. 아녀자들이야 어디 넓은 세상을 볼 일이 있나요?”

매창의 자조적인 말투는 제 기를 스스로 꺾고 바다 뒤로 넘어가는 석양을 닮아 있었다.

“네 말이 맞다. 좁쌀 한 알보다 작은 세상이지. 그런데 해 질 무렵이라니? 해가 떨어지고 나면 순식간에 깜깜해지는데 내려오는 길에 고생깨나 했겠구나?”

“하하하. 역시 대감은 상상력이 풍부하십니다. 보름 언저리라 달이 밝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집에 돌아가서 보니까 옷이 온통 흙투성이지 뭡니까? 치맛자락은 나뭇가지에 찢겨 엉망이었고요. 신발도 못 쓰게 돼서 내다 버렸답니다. 한나절 나들이 나왔다가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지요.”

얘기를 하다가 그날 일이 새삼 떠오르는지 매창은 살포시 웃었다.

“허허. 너도 나만큼이나 극성스러운 여인이구나. 다행인 줄 알아라. 네가 사내로 태어났더라면 나처럼 욕도 많이 얻어먹고 칭찬도 많이 듣는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을 것이다.”

허균은 숨이 찬지 걸음이 느려졌다. 숲을 벗어나니 바다가 훤히 보이는 바위가 턱 버티고 있었다. 바위에 일산을 씌워주듯 그 바위 주변에 바다 쪽으로 몸을 기울인 소나무가 대여섯 그루 서 있었다. 매창이 그 바위를 가리켰고 허균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자기 옆에 그녀 자리를 봐두었다. 허균은 한참 동안 말없이 먼 바닷길을 내려다보았다. 바다를 둘러싸고 여기저기 흩어진 섬에도 나무가 무성했다. 섬은 젊은 머슴의 숱 많은 턱수염 같았다. 매창은 어깨를 젖히고 가슴을 내밀며 심호흡을 했다. 허균은 그런 매창을 바라보다가 입을 떼었다.

“우주라는 것이 무엇이더냐? 태시(太始)라는 원초적 혼돈에서 우주가 생긴 거란다. 우주는 기를 낳고 그 기 가운데 맑고 밝은 것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땅이 되었다지 않느냐?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고 중국 천자가 하늘을 대리해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 진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더 먼 곳에서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들이야 어쨌든 백성들의 고달픈 삶은 달라질 게 없지. 그래서 내 가슴이 이렇게 답답한 것이다. 바깥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도 우리들의 지지부진한 삶은 도무지 달라지지 않으니 어쩌면 좋으냐?”

“중국에 와 있는 서양 사람들의 소식은 저도 간간이 듣고 있습니다. 말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요?”

매창은 먼 나라의 일들이 궁금했지만 보지 않은 것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섣부른 상상을 넘어선 일이리라. 다른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들, 다른 신을 모시고 다른 이치를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아닌가. 더욱이 머리색과 생김새가 조선이나 중국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너도 중국에 가보면 참 좋을 것인데 그것이 한이로다. 중국에서 만든 곤여만국전도라는 세계지도를 보면 중국보다 큰 나라들이 여럿이다. 일본 너머 구라파라는 나라엔 기리시단이라는 하늘을 섬기는 도가 있단다. 나는 중국을 지나서 그곳까지 가보고 싶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곧 그럴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때를 기다리시어요.”

“참을성이 없는 게 나의 병이다. 나는 지식을 탐하는 마음이 커서 먹어도 먹어도 항상 배가 고프다. 내 사주가 한퇴지와 소동파와 같다 하니 내 운명도 그들과 비슷하겠지. 다심하고 다난한 인생을 타고났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허균의 입은 화수분 같았다. 무슨 얘기든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말을 나눌수록 그는 이미 보여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얘기는 그를 절반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중국 사신을 두 번이나 수행하고, 중국에 갔다가 수레 가득 실어 온 서책을 읽고, 중국에 스승까지 둔 사람이다. 누가 그를 알아보고 누가 그를 올바로 평가한단 말인가. 간장 종지가 어찌 대접을 끌어안을 수 있겠는가. 종지는 종지만의 세계가 있고 대접에게는 대접의, 대야는 대야의 세계가 있다. 서로 견주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마칠 것이다. 대접이 종지를 알아볼 순 있어도 어찌 종지가 대접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까. 간장밖에 담아본 적 없는 종지로써 닭 한 마리, 술 한 말을 담아본 큰 그릇의 궁량을 어찌 짐작이나 할까. 허균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간장종지만 한 소견머리로 밥그릇 다툼이나 하고 앉아 있는 골샌님들을 보면 하품이 절로 나왔다.

“저는 운명 같은 건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한테 하나도 이로울 게 없으니까요.”

“이 멀리 부안까지 와서 너를 앞에 두고 다감한 얘기는 못해줄망정 한심한 작자들 뒷공론이나 하고 있구나. 나를 너무 나무라지 마라. 외로운 산림처사의 푸념이라 생각하고 들어다오. 다들 공부를 잘 못하였다. 공자가 말하는 충이란 본디 저항의 정신을 담고 있었단 말이다. 친구에게 바른 말로 충고하는 것도 충이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도 충이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도 충이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흘러 임금 개인을 위한 신하의 희생만을 충으로 여기는 것으로 변질되었단다.”

‘가엾은지고. 마음을 어디에 붙이지 못하고 떠다니는 사람이야. 한낱 기생 앞에서 자기변명을 늘어놓을 만큼 주위에 사람이 없구나. 흉금을 터놓을 벗을 찾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으니.’

매창은 자신이 대꾸할 자리가 아님을 알고 그저 들어주는 사람으로 옆에서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허균도 오랜만에 속 시원히 심중의 말을 하고 나니 맺힌 마음이 풀린 듯했다.

“너란 인간이란 어떤 괴물이냐?”

허균은 홀로 있을 때면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그 물음이 두렵고 그 해답이 두려워 그는 혼자 있기를 삼갔다. 벗들과 술을 마시거나 여인의 품을 찾았다. 세속의 영웅주의와 걸림 없는 자유인 사이를 오가는 분열적인 삶이 그를 쉬지 못하게 했다. 두 개의 인격 중 어느 것이 진짜 나인가, 그 물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어떤 인간이 자신의 실체일까? 다름 아닌 그 스스로 먹이를 주는 대상이 자신의 실체인 것이다.

“너와 가까이 앉아 있으니 오랜 지기와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구나. 우정에 나이나 신분이 무슨 상관이더냐. 벗이 없는 사람이 제일 가여운 사람이다. 좋은 벗을 가까이 두어야 하느니라. 나는 이즈음 너무 많은 사람을 잃었다.”

매창의 마음을 본 듯 허균이 서름한 목소리로 자탄했다. 매창은 가슴이 뭉클했다.

“벗이라면 가까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서로의 희로애락과 생사고락을 함께해야겠지요. 제일 어려운 일이옵니다. 마음이 가까우면 몸이 멀고, 몸이 가까우면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고. 대감께서 말씀하신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도 이것이 제 운명인가 하옵니다.”

“오래도록 함께한다는 것, 어려운 일이지. 너만은 내게 그렇게 해다오. 나도 그리하마. 이렇게라도 부끄럽고 불편한 양반 허울을 벗어버리니 좋구나. 고맙다. 너 같은 벗이 있어 이리 흔쾌히 즐길 수 있으니 고맙구나. 앞으로 이 세상에 좋은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 세대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되고말고. 우주의 이치란 그런 법이다.”

허균은 도포와 갓을 벗어 소나무 가지 위에 걸쳐놓았다. 미풍이 그의 수염을 흔들고 지나갔다. 소나무 냄새와 바다 냄새가 서로 누가 더 센지 겨루듯 번갈아가며 콧속으로 들어왔다. 매창은 바람에 들썩이는 저고리 고름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저도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이승에서가 아니라면 저승에서라도.”

“다른 세상에서는 남녀의 이치조차 바뀔 것이다. 생명은 모름지기 암컷들의 주관 아래서 벌어지는 일이란다. 남녀의 교합도 사실은 전적으로 여자를 위한 것이지. 수컷들이야 땀이나 뻘뻘 흘리다 제 욕망 채우고 방사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쾌락은 오롯이 여자의 것이니라. 여자는 이 우주에 모성을 불어넣어 생명을 낳는 존재이지 않느냐? 어미가 된다는 것, 그보다 큰일은 이 세상에 없단다. 머지않아 여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모성을 원하는 시대가 온다고 말하는 편이 더 맞는 말이겠구나.”

“박복한 탓에 저의 몸이야 자식을 실어본 적은 없지만 그런 날이 온다면 한번 보고 싶사옵니다. 얼마나 다를 것인지. 무엇이든 어떻게든 변화는 기대를 갖게 하지요.”

매창은 허균과 얘기를 하다 보면 엄청난 일도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상대의 말을 세세히 파고들지 않고 대범하게 넘겨버리는 그의 성격 덕분이다. 그는 서얼, 천민과 평민들과 교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트집 잡는 사람이 있으면 목에 힘줄을 돋우며 맞섰다.

“한 사람의 재능은 하늘이 준 것이어서 귀한 집 자식이라고 더 주는 것도 아니고 천한 집 자식이라고 인색하게 주는 것도 아니다. 서얼을 차별하여 벼슬자리를 제한하는 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다. 원망을 품은 사내와 홀어미가 나라의 반을 차지하는데 화락한 세상을 이룰 수 있겠느냐? 어림없는 일이다.”

그는 밥상에 관해서도 보통 양반과는 다른 의미로 엄했다. 삼첩반상을 넘어선 안 되었다. 미식가이지만 상에 가득한 음식을 보면 현기증이 난다고 했다. 또 한 가지, 누구에게고 밥상 아래서 밥 먹는 것을 금했다. 여자건 누구건 함께 밥상에 마주 앉아 먹도록 했다.

“지금 대감이 하신 말씀을 열 사람만 알아들어도 세상에 훈풍이 불 터인데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아무도 없단다. 그래서 내 친구가 그 속에서 죽었다. 곧 다시 만나자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만 뒷골목 길가에 쓰러져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다. 너를 만난다고 하니 네 모습을 잘 봐두었다 알려달라고 부탁하더라. 네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는 목이 잠겨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정은 평민 출신 화가였지만 허균과 친구가 되었다.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허균이 있었고 마음을 열어 허균과 우정을 나눈 이정의 깊은 속내가 있어서 아름다운 인연이 싹틀 수 있었다. 허균보다 아홉 살 아래인 이정은 술을 너무 좋아해 늘 만취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다. 새벽닭이 울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그리고는 형형한 눈빛으로 붓을 들었다. 귀기 어린 그 모습을 허균은 사랑했다. 이정의 할아버지, 아버지도 유명한 화가였다. 그 피를 물려받아서 이정은 열세 살에 금강산의 벽화를 그렸다. 허나 거리의 화가답게 서른 살 겨울에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얼어 죽었다. 이정은 평민이었지만 옳지 않은 것과의 타협을 모른다는 점에서는 허균과 어슷비슷했다. 이정이 움직일 때마다 언제나 많은 일화들이 그의 신발에서 일어난 먼지처럼 따라 일어났다. 이정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이정의 그림 실력과 뛰어난 재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그림을 찾는 사대부들이 늘어났다. 어느 재상이 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했다. 이정은 두말 않고 그림을 한 장 그려주고 사라졌다. 두 마리의 소가 재물을 가득 싣고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본 재상은 불 맞은 소처럼 펄펄 뛰면서 이정을 당장 잡아다가 치도곤을 내라고 명했다. 재상의 분이 풀릴 때까지 매를 맞은 이정은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그 정도에 마음이 흔들릴 이정이 아니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 얘기를 허균에게 전했다.

“부잣집 세도가의 매는 맵기가 자다가 얻어맞은 홍두깨 맛입디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정말 광 속에 쌓아놓은 재물이 많긴 많은가 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기겁을 하지. 허허허.”

허균은 불우한 이정의 재주를 아껴서 언제나 돕고 싶어 했다. 임지로 발령받아서 갈 때마다 그를 데리고 갔다. 관사에서 함께 지내며 그가 생계를 잊고 그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 친구의 죽음은 팔 하나를 잘라낸 것보다 더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싸늘한 바위에 핀 가을꽃이여, 무덤에서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

허균 자신이 정쟁에 휘말려 몇 번 파직을 당했을 때는 한 점 동요도 없었다. 친구를 잃게 만든 세상 앞에서는 몸을 떨며 분노하고 서러워했다. 천민들에게 양반은 가능하면 서로 얽히지 않고 살고 싶은 사람들이다. 양반과 천민은 서로를 경멸했으며 서로를 두려워했다. 서로를 알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깬 사람이 허균이었다.

“너와 함께 여기 앉아 있으니 누가 무슨 벼슬을 하건 싸우건 말건 아무 상관없을 듯싶구나. 서책이나 읽으며 너와 이리 얘기나 나누고 살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옛날에 학문하던 사람은 자기 한 몸만 닦으려고 하지 않았다. 본시 공부는 일신의 영달이 아니라 남을 위해 하는 것이어야 하느니라.”

허균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것은 암컷을 옆에 둔 수컷의 숨이 아니었다. 쓰라린 속을 달래지 못해 고통이 숨으로 토해져 나오는 것이었다. 이치를 깊이 공부해서 천하의 변고에 대응하고 도를 밝혀 천하와 뒷세상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저도 아옵니다. 알 수 있을 것 같사옵니다. 무엇이 됐든 살아갈 수 있는 나만의 방도 하나쯤은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도 대감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진 마시어요. 잠자리가 뒤숭숭하실 것이옵니다.”

매창은 먼 곳에 두었던 시선을 거둬들여 허균을 돌아보았다. 허균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남 못지않게 모진 일 많이 겪은 인생이었습니다. 질문에 답을 안 하면 말 없다고 야단이요, 대답을 하면 건방지다 야단이요, 어릴 적엔 뺨도 맞고 머리채도 숱하게 끄들렸답니다. 그들도 가슴에 한이 있어 그러한 것인데 맞상대해서 서로의 상처를 덧들이면 뭐하나 싶어서 참고 말았지요.”

“그게 바로 선비의 태도이다. 남에게는 후하고 나에게는 박해야 하는 법이지. 박기후인 아니더냐?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북돋워 주듯이 너의 강점에 너무 지배당하지 말고 약점을 잘 다독이고 북돋워주어라. 그래야 편하다. 묘수를 알게 되거든 나한테도 꼭 알려주고. 다음 세상에선 이보다 편하게 살아야 할 텐데. 팍팍함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저는 내세를 믿지 않아요. 닥칠 세상이란 없어요. 없어야 하구 말고요.”

매창의 간곡한 목소리에 허균은 말을 접었다.

“그래. 이승에서 살 것을 다 살자. 이승에서 못 산 사람이 저승에서 잘 살 리가 있느냐?”

허균은 도연명을 얘기하고 이태백의 시를 외운다. 도연명은 팔십 일 동안 원님 노릇을 하다가 귀거래사를 남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집 앞에 버드나무를 심어놓고 북쪽 창 앞에 앉아서 인생을 즐겼다. 오류선생이라는 별호는 그래서 생긴 것이다. 이태백은 온 천하를 눈 아래 내리깔고 보면서 세상의 권세 따위를 개미 새끼 보듯이 하였다. 스스로 산야에 박혀서 술로 인생을 즐기다가 동정호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은일과 단독자의 삶을 말할 때 허균은 수다스러워졌다.
유희경과의 대화가 하고자 하는 말의 절반은 심중에 남겨두고 삭이는 방식이라면, 허균과의 대화는 하고픈 얘기를 맘껏 세상에 내보내 저희들끼리 충돌하는 걸 지켜보는 방식이었다. 매창은 유희경이 다 하지 못한 말을 기다렸고 더듬었고 상상했다. 지금은 허균이 내놓은 말들의 충돌을 지켜보았다. 재가 되건 부싯돌이 되건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했다. 깊어지고 넘나드는 말에서 육체의 단내가 났다. 말은 인간의 가장 멀고 깊은 몸이리라.

“네가 이리 편안히 내 푸념을 받아주니 오랜만에 누이와 마주 앉아 대화를 하는 것 같구나. 너는 나보다 어리지만 속은 바닥을 가늠할 수 없게 깊다. 내 누이를 많이 닮았다. 누이는 나더러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일렀었다. 알면서도 속되고 좁은 도량 갖고서 큰소리치는 자들을 보면 참지를 못하겠다. 남 욕할 것도 없이 내 처세가 이리 졸렬하니 반평생 파란뿐이구나.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궁구할 책만 있으면 옥살이를 하건 쫓겨나건 내겐 낙원이 따로 없다. 속된 무리들과 함께 있으면서 고래진미 비단금침 속에 있으면 뭐하겠느냐? 목에 칼을 찬 듯, 몸이 화염 속에 던져진 듯 견디기 힘들다.”

매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 말이 세상에서 제대로 몸을 얻는 날이 언제이련가, 그녀는 궁금했다. 해가 설핏해지도록 두 사람은 공놀이하듯 말을 던지고 받고 다시 새로운 얘기를 던지고 받았다. 감정처럼 말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쌓이면 울혈을 만들어 기회가 왔을 때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오늘은 매창에게도 허균에게도 말을 맘껏 노닐게 만든 드문 자리였다.

작가소개
1964년 전북 익산 출생
건국대 영문과, 연세대 국제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소설>에 「기억의 집」으로 등단.
허균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수상.
2014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저서로는 소설집『식물의 내부』, 『스물다섯 개의 포옹』,
장편소설 『안녕, 추파춥스 키드』, 『위험중독자들』,
포토에세이집『On the road』, 에세이집『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것들』,

소설창작매뉴얼 『소설수업』, 번역서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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