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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졸리앙의 서울이야기

(25) 관광객과 이방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한번쯤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보자, 편견 없이 마음을 열게 해준다

드디어 오늘, 나의 가장 친한 한국 친구가 파리에 도착한다. 샤를드골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며, 저마다 요란스럽게 사진기를 꺼내드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을 바라본다. 순간 니체의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 속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그들은 짐승처럼 구슬땀을 흘려 가며 산을 기어오른다. 도중에 기막힌 절경이 자리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은 것이다.”

빛의 도시 이곳저곳을 거닐던 우리 눈앞에, 서로 진한 포옹을 나누는 두 남자의 모습이 포착된다. 친구는 당장 난색을 표하고, 나는 한국에선 남자들끼리 서로 좋아할 권리가 없느냐며 오히려 의아하게 물어본다. 곧이어 우리 두 사람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피갈가로 들어선다. 어느 카페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손님 두 명이 서로 논쟁에 열을 올리는데, 아마도 도널드 트럼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는 인종주의와 개인주의를 표상하는 인물이며, 장애를 가진 기자를 공개적으로 조롱한 적도 있다. 더군다나 그 주위를 둘러싼 인물들 면면을 살펴보면 그가 어떤 존재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아시아에서는 호의적인 시선도 더러 있는 듯한데, 유럽에서 트럼프는 그냥 혐오의 대상이다.

내친김에 점을 치는 친구 한 명을 더 불러낸다. 한참 대화를 나누던 그는 나의 한국 친구가 말끝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해, 한국에서는 이런 식이야, 한국 사람은 그렇게 하지를 갖다 붙이는 데 놀란다. 덕분에 전통의 의미에 대해 다 같이 생각해볼 기회를 갖는다. 한 국가의 문화란 무엇일까. 그에 속한 인간을 성장하게 도와주는 요람인가, 아니면 총체적인 인간이 되는 걸 방해하는 감옥인가. 결국 점쟁이 친구는 자리를 뜨면서 나의 한국 친구에게 이런 인사말을 남긴다. 부디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라. 행복한 한국인으로만 머물지 말고.

하이데거는 불확실성의 개념을 이렇게 정의했다. 인간은 자기가 체험한 것을 척도로 모든 것을 보기 마련이라고. 우리가 인도식당에 들어섰을 때도 나의 한국 친구는 어김없이 이런 말들을 쏟아냈다. 우리나라가 더 나은걸, 우리나라에선 종업원이 더 친절하지, 우리나라에선 서비스가 더 빨라.

비교는 존재의 생명력을 말살한다. 비교하는 순간 우리 삶은 한정된 틀에 갇히고, 지금 이 순간 무한으로 확장할 가능성을 상실한다. 한번쯤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보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나쁘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눈을 씻어주고 마음을 열게 해주어, 우리 자신이 낯익은 가치를 뛰어넘는 존재임을 실감하게 해준다. 익숙한 신념들보다 풍요롭고, 편견보다 폭넓은 삶이 허락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여행을 한다는 것, 마음과 정신을 활짝 연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우리는 세계시민으로서, 각자 형제자매임을 깨달아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들이다. 루브르에 구현되어 있는 문화, 에펠탑과 대성당들, 눈부신 예술품들을 축조한 문명은 우리를 보다 고결한 심성으로 진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해준다.

바로 그 문화 속에서 우리는 여론과 진실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을 가진다.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그가 옳아서가 아니다. 다수의 사람이 승인한다고 해서 어떤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비교와 판단 없이, 모든 나라를 마치 새로운 우주를 방문하듯 드나들 수 있어야 한다. 매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기적을 누리면서 태양 아래 살아가는 거다. 그래야 허겁지겁 사진부터 찍고 추억 만들기에 급급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눈뜰 수 있다.

스위스 철학자/번역 성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