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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불복이 정의라는 착각의 두 광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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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뉴스분석

28일 오후 서울 안국동 헌법재판소 정문 좌우엔 전혀 다른 피켓 두 개가 등장했다. 왼쪽 피켓엔 ‘헌재는 조작 선동 언론에 의한 대통령 탄핵을 기각하라’가, 오른쪽 피켓엔 ‘탄핵은 국민의 염원! 신속한 탄핵 선고로 불을 앞당겨 주세요!’가 적혀 있었다. 탄기국(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운동본부)과 퇴진운동(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각각 내건 구호다. 3·1절 98주년을 맞은 1일 양측은 오후 2시(탄기국 주최)와 오후 5시(퇴진운동 주최) 각각 대규모 집회를 연다.

권위주의 정부에 대항하며 #‘불복=정의’뒤틀린 인식 #“탄핵 인용되든 기각되든 #특정세력의 승리 아니다” #포용·관용의 리더십 중요

헌법재판소를 향한 위험한 압력들은 불복(不服)의 위기로도 번지고 있다. 대통령 대리인단의 김평우 변호사는 지난달 27일 공개 집회에서 “무조건 승복하라는데 우리가 노예냐”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로 상징되는 법치에 대한 불복은 반문명(反文明)이며, 자칫 대한민국 역사를 뒷걸음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원로·학계의 우려가 크다.

#불복의 뿌리=최선을 다해 경쟁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건 민주사회의 기본 원리다. 그런데 왜 좌·우 가리지 않고 불복을 부르짖는 것일까. 임동욱 한국교통대 교수는 “극단적 대립 국면이라 도드라졌을 뿐 한국 사회 불복의 뿌리는 넓고 깊다”고 전했다. 다층적인 불복 문화부터 꼼꼼히 짚어야 난국을 헤쳐 나갈 실마리가 풀릴 수 있다고도 조언한다.

불복의 근원엔 ‘불복=정의’라는 뒤틀린 정서가 도사리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 대항하며 형성된 착시다. 군부 독재에 저항하면서 ‘불복의 정당성’이 내재화해 온 셈이다.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단기간에 민주주의를 쟁취한 경험이 ‘불복 후유증’을 낳고 있다”고 말했다.

룰 자체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인식도 문제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법이란 권력자의 통치 편의였다. 조선시대 양반계층이 병역 면탈을 공공연히 저지른 배경이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복 정서가 일반 대중에게도 전파됐다”고 전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법을 자신의 입맛대로 재단해 온 기득권층이 불복의 원인 제공자”라고 규정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씨는 “한국전쟁 때 ‘낮엔 국방군, 밤엔 인민군’을 경험했다. 권력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제도란 언제든 달라진다는 걸 체득한 셈이다. 일관성이 약한 데 누가 따르겠느냐”고 말했다.

#불복의 정치=지난달 박근혜 대통령은 정규재TV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에서는 사과해선 안 된다, 잘못해도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박 김진태 의원은 “(헌재 재판관들이) 탄핵을 인용했다가는 태극기에 깔려 죽을 수 있다는 걱정을 할 것”이라며 “이런 걱정을 안 하려면 탄핵을 각하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탄핵이 기각될 경우) 승복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복의 정치가 존재하는 건 불복에 대한 응징이 약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승만 정권은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정권을 연장했다. 한국 정치사의 상징적인 불복 행위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했지만 정권을 잡았고, 이인제는 경선에 불복하고도 표를 얻었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는 “불복이 상흔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 정치가 입증해 오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승복하지 않으면 정치적 재기가 불가능한 정치 선진국과 천양지차다. 


#불복의 극복=지난해 말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포스트 트루스(post-truth·탈진실)’를 올해의 단어로 꼽았다.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신념이 중시되는 세태를 우려한 결과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을 거치며 이제 불복은 전 지구적 현상으로 부상 중이다. 기승을 부리는 가짜 뉴스는 무엇이 승복이고, 불복인지조차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불복은 그 심각성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첫 단추다.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대학에서 교수 한 명 내쫓을 때도 홍역을 치른다. 결과가 어떤 식이든 살점 떨어져 나갈 각오를 우리 모두 해야 한다. 무엇보다 특정 정치권의 승리가 아니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평중 교수는 “민주주의 진화를 위해 겪어야 할 성장통”이라고 말했다.

먼저 정치권이 앞장서야 한다는 요구도 많다. 임동욱 교수는 “포용과 관용의 리더십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다행히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임박해지면서 문재인·안철수·유승민·남경필 등 주요 대선주자들은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승복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나는 반드시 대통령이 탄핵돼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기각돼도 승복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통령 탄핵보다 민주주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최민우·홍상지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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