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수학 잘하던 괴짜 … 빚 시달려도 친구 챙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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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백인수씨가 2001년 친구 백남준에게 그려준 '화경사해(畵境四海)'. 비디오 아트 창시자의 뿌리가 한국임을 드러내기 위해 전통 장롱과 비디오 화면을 겹친 뒤 잔나비띠 백남준의 얼굴을 집어넣었다.

백남준과 나는 잔나비띠 동갑이다. 일흔네 살 한창인데 친구가 먼저 내 곁을 떠났다. 두어 달 전에도 전화로 "일 많이 하고 오래 살자" 약속했는데….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 모양이다.

경기도 용인에 들어설 자신의 미술관 건립이 자꾸 늦어져 속상하다는 하소연 끝에 "내 얼른 나갈 테니 개관 때 보자"던 한마디가 자꾸 귓가를 맴돈다. 백남준 미술관을 하루라도 빨리 지어 달라는 것이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애국유치원.수송초등학교.경기공립중학교(경기고등학교 전신, 6년제)를 함께 다녔다. 남준은 수송초등학교 시절, 전 과목을 10점 만점 받아 1등으로 졸업했을 만큼 천재로 이름을 떨쳤다. 경기중에 들어가서도 상위권을 다퉜는데 특히 수학과 물리를 잘했다. 재미난 건 그때 벌써 남준의 기행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남준은 콧물을 흘렸는데, 교복 양쪽 소매를 콧물로 반들반들하게 만든 그 모습이 예술이었다.

그 시절, 공부 좀 한다는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로 빠지는 것이 시대적 분위기였다. 백남준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벽암이나 정지용 등 월북 시인의 시를 즐겨 읽고, 그 시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계통 책을 읽는 독서회에도 열심히 나가는 바람에 가끔 우파 애국청년단에 끌려가 매를 맞는 일도 있었다. 남준의 예술가적 기질, 반항아적 취향이 좌파 성향과 통했던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섬유업을 하던 남준의 부친은 똑똑한 막내아들이 가업을 이어 사업가가 됐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이런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고 음악과 미술을 공부한 남준에게 이른바 향토 장학금이 끊긴 것은 다시 돌아오라는 신호였지만 그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굶더라도 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남준의 뚝심은 대단했다.

영어에 관한 상반된 얘기도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내가 알기로 학창시절부터 남준은 영어를 굉장히 잘했다. 독일어.일본어.프랑스어도 꽤 한다. 그런데도 그는 "나는 영어가 짧다"고 말하곤 했다.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유럽인은 영어를 너무 유창하게 하는 이방인을 잘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술가로는 성공했지만 돈과는 참 인연이 멀었다. 큼직한 전시회나 국제 위성 쇼를 하고 나면 남는 건 빚뿐이어서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런 와중에도 친구는 끔찍하게 챙겼다. 1992년 서울 원화랑에서 열린 '이백전(二白展)'은 남준이 나를 위해 마련한 2인전이었다. "백남준과 백인수가 나란히 작품을 걸면 손님이 좀 들지 않겠느냐"며 일부러 시간을 낸 것이다. 팔아 쓰라고 귀한 판화도 몇 점 주고 갔는데 나는 그걸 아직도 소중하고 간직하고 있다.

35년 만에 모국을 찾아와서는 옛 동무 귀에다 "내가 큰 사기꾼이야"라고 속삭이던 천진난만한 친구. 이보게, 내 곧 따라 갈 테니 거기서 생전에 못한 레이저 아트 하면서 신나게 놀고 있게.

백인수(화가·시사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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