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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중헌디? 빵도 나눠 먹어야 더 맛나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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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전남 곡성군 곡성읍 '나눔 시루' 가게 1호점 모짜르트 제과점 주인 이강하씨. 뒤쪽에 내걸린 노란색 쿠폰은 지난 1년간 손님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남겨 독거노인, 여행자 등이 사용한 것들이다. [프리랜서 오종찬]

전남 곡성군 곡성읍 '나눔 시루' 가게 1호점 모짜르트 제과점 주인 이강하씨. 뒤쪽에 내걸린 노란색 쿠폰은 지난 1년간 손님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남겨 독거노인, 여행자 등이 사용한 것들이다. [프리랜서 오종찬]

전남 곡성에 가면 돈이 없어도 누구나 빵 한두 개쯤은 먹을 수 있다. 곡성군청 앞 사거리에 있는 작은 빵 가게에서다. 가게 내부 한쪽에 올려진 시루에서 일정한 금액이 적힌 쿠폰을 꺼내 현금처럼 쓰면 된다. 주인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앞서 빵 가게에 들른 손님이 다른 사람을 위해 미리 돈을 낸 쿠폰이기 때문이다.

곡성 빵가게 이강 하씨 ‘나눔 시루’ 운동 #독거노인 등 위해 이색 기부함 설치 #손님이 쿠폰에 액수 등 적어 기부 #밥카페, 치킨집 등 2·3·4호점 퍼져

3만여 명의 주민이 모여 사는 농촌 곡성에 따뜻한 기부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 1년여 전 곡성군 곡성읍 모짜르트 제과점 대표 이강하(45)씨가 시작한 ‘나눔 시루’ 운동에서 비롯된 기부 문화의 확산이다.

이씨는 지난해 2월 독거노인이나 저소득층 아동 등 어려운 이웃과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를 위해 시루 하나를 가게에 놨다. 조상들이 떡이나 음식을 찌거나 콩이나 나물을 길러 이웃과 함께 나눠 먹을 때 쓰던 시루에서 착안한 이색 기부함이다. 손님들이 잔돈을 쿠폰으로 바꿔 놓아두는 용도다. 예를 들어 9000원어치 빵을 산 손님이 1000원을 기부하고 싶으면 1만원을 결제하고 쿠폰을 받은 후 1000원이라고 적으면 된다.

이씨의 빵 가게를 찾은 상당수 손님들은 자신보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이들을 위해 기꺼이 빵값보다 더 많은 돈을 내놨다. 9000원어치 빵을 산 손님은 누군가 1000원짜리 소보루빵 하나를 먹을 수 있게 1만원을, 1만5000원어치를 산 손님은 2만원을 결제하는 등 각자 형편에 맞춰서다.

전남 곡성군 곡성읍 '나눔 시루' 가게 1호점 모짜르트 제과점 주인 이강하씨. 뒤쪽에 내걸린 노란색 쿠폰은 지난 1년간 손님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남겨 독거노인, 여행자 등이 사용한 것들이다. [프리랜서 오종찬]

전남 곡성군 곡성읍 '나눔 시루' 가게 1호점 모짜르트 제과점 주인 이강하씨. 뒤쪽에 내걸린 노란색 쿠폰은 지난 1년간 손님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남겨 독거노인, 여행자 등이 사용한 것들이다. [프리랜서 오종찬]

1년간 200여 명이 이씨의 빵 가게 시루에 쿠폰을 남겼다. 금액은 적게는 1000원부터 많게는 5만원까지 다양했다. 여러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자신이 낸 돈을 여러 개 쿠폰으로 쪼개 남기고 간 이들도 있었다. 쿠폰에 “추운 겨울 혼자 계시는 어르신께 든든한 한 끼가 됐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일하시는 공무원 아저씨 드세요” 등 짤막한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읍내에 일을 보러 온 독거노인, 학교를 마친 초·중·고교생, 곡성을 찾은 여행자들은 허기에 무심코 들어간 이씨의 빵 가게에서 온기를 느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남기고 간 쿠폰으로 빵을 먹고 감동했다. 이에 자신이 쓴 쿠폰보다 더 큰 금액을 결제해 또다른 누군가를 위한 쿠폰을 남기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엔 우려도 있었다. “시루의 쿠폰을 뽑아 쓰는 사람만 있고 채워놓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기우였다. 시루가 비좁을 정도로 쿠폰은 늘 가득했다. 단골 손님들은 시루에 남는 공간이 조금이라도 커지는 게 보이면 쿠폰을 채웠다.

나눔 시루는 아이들 교육 효과도 컸다. 이씨는 “가게에 찾아온 아이들이 기부가 주는 즐거움과 행복감을 자연스럽게 느끼면서 ‘저도 빨리 어른이 돼 돈을 벌어 쿠폰을 남기고 싶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며 “처음엔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쿠폰을 썼던 아이들이 자신보다 더 어려운 친구가 빵을 먹을 수 있게 쿠폰을 남겨놓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씨가 처음 퍼뜨린 나눔 문화는 주변 가게로도 이어지고 있다. 곡성읍 일대 밥카페, 치킨집, 여행자카페 등이 최근까지 나눔 시루 가게 2·3·4호점이 됐다. 이들 가게에서도 누군가 시루나 바구니에 남기고 간 쿠폰을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데 쓸 수 있다.

곡성에서 나고자란 빵가게 주인 이씨 역시 고향 이웃들을 위해 손님들 못지 않게 열성적으로 기부한다. 팔고 남은 빵이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푸드뱅크에 수시로 기부하거나 형편이 좋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아기에게 생일케이크를 후원한다.

이씨는 곡성 전역에 나눔 시루 가게를 늘려가는 게 목표다. 이씨는 “거창한 기부가 아니더라도 우리 일상에서 얼마든지 남을 도울 수 있다”며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은 기부를 이웃들과 꾸준히 계속해 ‘나눔이 중하다’는 것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곡성=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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