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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가만 배 불리는 21세기 과학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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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산업부 차장

최준호 산업부 차장

불안과 위기감은 누군가에겐 돈이며 사업 기회다. 며칠 전 서울 강남의 한 학원에서 과학자임을 자처하는 강사가 학부모들을 모아놓고 상담을 진행했다. 눈에 가득 불안과 초조함을 채운 ‘엄마’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었다.

"사실 나도 과학자이지만 이건 문제가 심각합니다. 아예 없애거나 준비기간을 충분히 줘야 합니다. 선행학습을 하느라 밤늦게까지 학원 뺑뺑이를 도는 아이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5~6주 만에 특정 주제로 토론대회를 위한 실험과 보고서 작성을 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매년 4월 과학의 날을 앞두고 한국과학창의재단에서 초ㆍ중ㆍ고교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과학탐구토론대회’를 비판하는 말이었다. 사실 강사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현실이 이러하니 아이들에게만 맡겨놔서는 안 된다. 돈을 주고 학원에 맡겨라’는 얘기였다. 과학탐구토론대회나 소논문 발표 등의 경력은 수시 비중이 커지고 있는 대학입시에서 중요한 ‘스펙’중 하나다. 실제로 강남 학원가에는 영어ㆍ수학뿐 아니라 각종 교내외 대회 참여를 지도해 주는 학원에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 이쯤 되면 백약이 무효다. 21세기에 맞는 창의성 있는 교육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내놓은 과학탐구토론대회가 학원가의 배만 불리고 있다.

최고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전국 영재고ㆍ과학고의 현실은 어떨까. 본지의 연중기획 리셋코리아 4차산업혁명 분과위원회에 참여한 한 영재교육 전문가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 영재고ㆍ과학고는 영재교육이 아닌 ‘선행학습기관’으로 전락했다. 진짜 필요한 창의성 교육은 사실상 없다고 못박았다. 교사는 학생이 이미 선행을 했다는 전제 하에 수업을 진행한다. 주중 기숙사 생활을 하다 주말에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은 부모와 정을 나눌 시간도 없이 또 학원으로 내몰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신성적 경쟁에서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고교 때 대학 과목을 미리 공부하는 AP(Advanced Placement) 과정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교 때 대학 수준의 연구경험을 심어 주기 위해 마련한 R&E(Research & Educationㆍ과제연구) 제도도 헛일이다. 원래는 대학 실험실에 가서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연구에 참여하는 프로그램이지만 R&E 수업을 하는 학생 중 열에 아홉은 연구실에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들러리나 잡일을 하는 데 그친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재ㆍ과학고의 R&E 활동은 최근 일반고까지 번지고 있는 추세다.

이렇게 공부한 우수학생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은 이공대가 아닌 의대다. ‘전국 의대 한 바퀴 돌아 서울공대’란 말까지 생겼다. 하지만 한국 최고 두뇌를 모아놓은 의과대학의 연구능력은 바닥수준이다. 의대생들의 목표가 사회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연구개발이 아닌 성형외과ㆍ피부과 의사이기 때문이다. 오는 4월 21일 과학의 날 50주년을 맞는 대한민국 과학교육의 현실이다.

최준호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