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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매창 ㅡ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ㅡ #14. 너는 나의 심복지우니라 (1)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가는 사람은 가고 오는 사람은 온다. 유희경이 떠난 뒤 이귀가 매창의 곁을 지켰다. 그는 지방 군수로, 그녀의 정인으로 한세월을 보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는 평온했다. 미진함, 아쉬움, 억울함 같은 감정은 관계를 해치지만 원하는 것이 확실할 때는 그런 감정이 들어올 틈이 없다. 이귀는 매창의 시와 거문고가 필요했다. 이귀의 물질적 도움과 든든한 후원은 매창의 생활을 지켜주었다. 둘은 있는 듯 없는 듯 곁에 있어주면서 서로에게 수족처럼 절실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귀도 임기를 마치고 매창을 떠났다.

애통해하지 않는 이별, 성숙한 어른의 이별이었다. 서로 잘 지내길 빌어주고 진심으로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았다. 줄 때는 애달프고 절절하다가도 돌아설 땐 준 것을 차갑게 빼앗아 가는 게 사랑인 줄 알았다. 사람이 오고 가는 일이 한 가지 모양만은 아니었다. 비가 내려 꽃을 키우고 개울물이 소에게 젖을 만들어주듯이 양분으로 남는 관계도 있다는 건 귀한 경험이고 깨달음이었다. 매창은 마음이 한 뼘쯤 자란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이전과 다른 나, 이전보다 너른 마음을 가진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의 키가 그만큼 자란 덕분일까. 그녀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매창이 허균을 만난 것은 신축년 성하(盛夏)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 벼슬을 얻어 부안에 왔다. 정유년의 난이 수습되고 삼 년이 지났다. 그는 서른 살 초반인데 벌써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서얼보다 못한 신세가 되어 떠돌아다녔다. 공무는 뒷전인 채 부처를 섬기다가 삼척 부사 자리에서도 쫓겨났다. 아내가 쌀독에 쌀이 떨어졌다고 한탄할 정도로 살림살이가 형편없었다.

“여보, 너무 걱정 마오. 곧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이니. 참판 어른께 청을 넣었다네. 조관 자리라도 하나 얻어달라고 말이야.”

조관은 각 고을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인 쌀을 서울로 운반하는 일을 감독하는 종5품 벼슬이다.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자연이나 벗하며 살 생각으로 그 벼슬을 얻고자 했다. 실제로 조관은 고을 수령에게 환대받는 벼슬이기도 했다. 그들의 부정을 끄집어낼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그들과 야합해서 한밑천 남길 수도 있는 자리였다. 가는 곳마다 극진한 술대접을 받았다. 관리들이 지방 출장을 가면 그 고을 기생이 수청을 드는 건 관례였다.

허균이 전운판관이 되어 부안에 부임하자마자 아전과 백성들이 모여서 수군거렸다. 천하의 방탕아라는 소문이 허균보다 먼저 부임지에 당도했다. 행실이 괴이해서 모친상을 당하고도 기생과 놀아나고 나라에서 금하는 참선과 예불은 빠지지 않는 괴물이라는 평이었다. 그것을 명민한 허균이 모를 리 없었다.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요, 예법 행검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성인을 낸 것은 하늘이니 내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은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린 성품은 감히 어기지 않겠다. 나는 나대로 내 길을 갈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아라.”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세상이 자기를 뭐라 하든지 거기에 얽매이지 않았다. 내세를 믿는 불교를 공부했기 때문일 거라고 매창은 이해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여유, 진짜 판결은 나중에 받겠다는 의지가 그를 자유롭게 해주었을 것이다. 오만방자하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수위의 언행이었다. 해운판관이라는 직임을 수행할 때는 엄격하기 이를 데 없어 허투루 일하는 아랫사람을 매로 다스리기도 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자유롭다 못해 분방했다. 때로 분방을 넘어서 방만하기까지 했다.

허균은 측근과 함께 부안을 두루 돌아보았다. 절벽이라 접근하기도 힘든 곳에 미륵불이 새겨져 있는 월명암을 찾아갔다. 절 마당을 거닐고 주지승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나면 마음속 허열이 다독여졌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동행이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고 청했다. 한참 떨어진 상소산 아랫동네의 객점인데 몇 시간 가야 하지만 관아와도 가까우니 나중에 이동하기 좋다고 부추겼다. 소문으로만 듣던 매창을 직접 만나봐야만 진짜 부안을 본 것이라는 결정적인 한마디로 그를 설복했다. 허균도 매창 얘기는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인 석주 권필에게 시를 받아 읽은 적도 있었다. 두 말할 필요 없이 그는 동행을 따랐다.

관아 뒤 상소산 끝자락쯤에 아담한 집 한 채가 운치 있는 매창의 객점이었다. 청보랏빛 수국과 분홍색 상사화가 활짝 피어 집 앞을 장식하고 있었다. 사람보다 먼저 꽃향기가 손님을 맞았다. 마당 여기저기에도 온갖 꽃들이 향내를 뿜어냈다. 방은 양쪽으로 두 칸씩 네 칸이었고 가운데는 사방이 내다보이는 대청마루가 훤했다.

마당으로 들어서던 허균은 방 안에 단정히 앉아서 책을 읽는 매창을 발견하였다. 옆 사람에게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고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조금 있다가 마루 가까이 다가갔다. 매창의 이마와 코끝과 입술로 이어지는 얼굴선은 가늘고 길어서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혼자 있는데도 모자람이 없이 꽉 찬 느낌이 드는 여인이었다. 담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모시 저고리 고름을 들썩였다. 창가의 매화나무에는 매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다. 마루 벽에 그녀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 족자가 걸려 있었다.

塡 不 滿 慾 海
攻 不 破 愁 城

굵고 큰 글씨체로 시원스럽게 써 내려 갔지만 글자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의미는 만만치 않았다. 욕망은 바다와 같아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고 근심의 성은 아무리 공격해도 부술 수 없다는 말은 보통 배포가 아니면 내놓기 어려운 말이다. 마음의 일조차 거침없이 해치울 여인이구나. 정신의 현이 팽팽히 당겨지는 느낌을 허균은 오랜만에 맛보았다. 그녀에게로 눈길을 주었지만 독서 삼매경에 빠진 매창은 손님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계시오?”

매창은 고개를 밖으로 돌렸다.

“어서 오시어요.”

밖에 서 있는 손님을 일별하고 놀라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조용한 걸음으로 댓돌에 내려서더니 안으로 드시라고 두 손으로 방을 가리켰다.

“집이 아주 조용하군그래.”

허균 옆에 서 있던 얼굴이 유난히 희고 둥근 남자가 입을 열었다. 청나라에 세 번이나 다녀온 역관 김성운이라고 허균이 간단한 소개를 했다. 허균의 동행은 비록 중인이었지만 문리도 트이고 대국을 드나들어 견문을 넓힌 사람답게 노는 품에 천기가 없었다. 신분이나 지체에 상관없이 생활은 상당한 수준을 갖춘 덕분일 것이다. 조선에 돌아다니는 비단과 사치품은 대부분 역관을 통해 들어왔다. 거래를 중개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한 역관들은 자신의 신분보다 높은 사람들과 사귀는 것이 보통이었다.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와 좌정하자 매창이 뒤따라 들어와 절을 올렸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느냐?”

“사람 사는 집에 사람이 찾아오는 게 뭐 그리 놀랄 일입니까? 게다가 이곳은 객점인걸요. 잘 오시었습니다.”

“그 또한 그렇구나. 네가 조선의 명기라는 매창이더냐?”

“명기인 줄은 모르겠지만 이름은 매창이 맞사옵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천하절색은 아닌데 무엇이 출중해서 명기라는 명성을 얻었을꼬? 안 그런가, 김 역관?”

“매창의 문자향은 꽃향기를 앞지른다고 다들 입을 모아 얘기합니다. 분내 나는 다른 여인과 비교해서는 아니 될 듯싶사옵니다. 여색을 보는 안목이 높으신 교산 대감의 취향에 맞을지 어떨지 한번 시험해보시지요.”

“허허 그런가? 매창아! 정녕 그러하냐?”

교산 허균에 대한 평은 돌고 돌아 매창의 객점에도 당도해 있었다. 시재는 뛰어나지만 방자하여 웬만한 사람과는 말을 섞지 않고 무례히 면박을 주기 일쑤라고 하였다. 매창은 본시 떠도는 말 따윈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술자리에서 온갖 추태와 함께 양반들의 바닥까지 다 본 터에 무슨 말을 더 보탠단 말인가. 술에 취하면 남정네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난 뒤로는 진면목이라는 말을 달리 해석하게 되었다.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재미 삼아 지껄이는 인물평이나 풍문 따위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기생으로 퇴물이라 불려도 따질 나이가 아닌 처지에 어찌 명기 운운하는 말을 받자옵겠습니까? 그런 말씀은 거두시지요. 쇤네 겨우 까막눈을 벗어난 정도인데 문자향이라니요? 가당치 않사옵니다. 교산 대감이야말로 시속의 평이나 세간의 소문과는 사뭇 거리를 두고 사시는 분이라 들었습니다만. 남의 말로 쇤네를 이리 당황하게 하시니 역시 사람들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되는가 보옵니다.”

허균은 무릎을 치며 가가대소하였다.

“허허허, 말솜씨는 가히 명기라 불리고도 남음이 있구나. 내가 이곳에 온 까닭이 뭔 줄 아느냐? 너를 혼내주러 왔느니라.”

허균은 말을 마치고 매창의 눈치를 살폈다. 매창은 김성운을 돌아보며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눈으로 물었다. 김성운 역시 미소만 지을 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섣부른 대응을 삼가겠다는 자세였다.

“네가 무슨 재주가 그리 많기에 한양의 사대부들이 너의 시를 돌려 읽으며 혀를 차는 것도 모자라 이리 먼 길을 찾아오게 만든단 말이냐? 고연지고. 이마에 뿔이 났나, 코가 둘인가, 얼마나 별난 사람인가 보러 왔느니라.”

“제가 보기엔 이마에 뿔도 없고 코도 하나뿐이옵니다.”

허균의 일갈에 김성운도 너털웃음을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벌써 서로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매창은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저의 말솜씨야 우둔하기로 이름났으니 서툰 솜씨나마 거문고 한 곡조 올리겠습니다.”

허균이 눈을 반짝이며 매창의 매무새를 골똘히 살폈다. 과연 흔히 보는 여자들과는 다른 자태였다. 조용하면서 조금도 흔들림 없는 태도에 기품이 묻어났다. 허나 기생이 기생답지 못할 때는 그만큼 고충도 많았을 터. 허균은 그녀의 몸가짐과 손놀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아씨, 저 왔어요. 손님이 오셨는가 보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매창을 반기는 소리였다. 매창은 밖에다 술상을 준비하라 이르고 자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매창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을 주었다. 매창은 거문고 앞에 앉아 참새가 벼 이삭 위에 올라앉듯 왼손을 거문고 줄 위에 살포시 얹고 오른손으로 술대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두 사람과 눈을 맞춘 뒤 술대를 밀었다. 술대 쥔 오른손은 비단이 봄바람에 하늘거리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녀의 숨결과도 같은 잔잔한 가락이 거문고 줄을 타고 방 안으로 흘러나왔다.

허균은 숨도 쉬지 않는 듯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애상이 깃든 곡조를 넘어서고 나자 계곡물처럼 시원한 곡조가 이어졌다. 거문고 소리는 폭포수가 되어 그의 가슴으로 쏟아져 내렸다. 매창의 이마에 땀이 밸 즈음 보채는 아이를 재우려는 듯 순한 가락이 그의 술잔 든 손을 멈추게 했다. 매창의 낯빛이 가파른 곡을 탈 땐 발갛게 상기되었다가 잔잔한 음일 때는 어깨와 함께 편안히 내려앉았다.

“너에 대한 소문이 결코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미안하다. 첫 만남에 공연히 허튼소리로 너를 폄하해서.”

허균은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던지는 사람인가 싶었는데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내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했다. 양반으로서 판에 박은 예의범절을 내세우지 않는 점이 인상 깊었다. 내공과 실력이 따라주지 않는 범절과 권위는 역겨울 뿐이다. 매창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는 허균의 태도도 경계심을 녹이는 데 한몫했다. 김성운도 튀지 않게 슬쩍 자신의 의견을 내놓으며 분위기를 북돋웠다. 허균은 술상이 들어오자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채우고 건배를 청했다.

“매창아, 오늘 밤을 시주의 참맛을 듬뿍 느낄 수 있는 밤으로 만들어다오.”

술자리는 삽시간에 웃음과 정담이 넘쳐났다. 매창의 거문고 연주에 허균이 시로 화답하면 매창이 답시를 지었으며 그다음에 김성운이 술을 한 잔씩 치는 식이었다. 세 사람은 사는 일의 고달픔도 외로움도 잊고 오직 이 순간에만 머물렀다. 매창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고도 허균의 천품과 재능을 바로 알아보았다. 허균은 매창의 예인다운 여리고 날카로운 마음을 위무할 줄 알았다. 오랜 객지 생활에 찌든 김성운은 따사로운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안온한 기운을 즐기는 듯싶었다.

“대감, 오늘은 고기가 물을 만난 셈이군요. 술과 시와 음악이라면 둘째를 마다하는 분이 교산 대감 아니십니까? 이제부터 이곳 부안에서 이 여인과 찰진 세월 보내시겠사옵니다.”

김성운은 추상이나 허울과는 거리가 먼 실용과 실재의 이야기를 그 특유의 유연한 사고방식에 실어 전달했다. 술도 썩 잘 마셨다. 청나라를 오가며 독주에 길이 든 그였다. 조선의 술로는 취기를 불러올 수 없었다. 시종 술을 따르고 술잔을 권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지루해질 만하면 청나라에서 있었던 일들을 양념처럼 끼워 넣었다.


작가소개
1964년 전북 익산 출생
건국대 영문과, 연세대 국제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소설>에 「기억의 집」으로 등단.
허균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수상.
2014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저서로는 소설집『식물의 내부』, 『스물다섯 개의 포옹』,
장편소설 『안녕, 추파춥스 키드』, 『위험중독자들』,
포토에세이집『On the road』, 에세이집『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것들』,
소설창작매뉴얼 『소설수업』, 번역서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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