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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만드는 정치권의 헌재 압박은 법치주의 포기다

중앙선데이

입력

사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와 탄핵에 반대하는 태극기집회의 세(勢) 대결이 점점 격렬해지고 있다. 양쪽 모두 헌법재판소를 압박해 탄핵심판 결정에 영향을 미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심각한 국론 분열에 대한 우려는 물론이고 헌정 질서가 파괴되고 법치주의의 근간이 허물어지는 극단적 상황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시민이 늘고 있다.

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 최종변론(24일)을 앞둔 마지막 주말 집회가 열렸던 어제도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은 촛불과 태극기 세력 집회로 두 동강났다.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는 국민 저항운동 돌입을 선언했다. 이들은 “죽음으로 맺은 약속을 바탕으로 결사 항전할 것을 천명한다”며 “이제는 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의 평화적인 방법을 넘어설 것”이라고 밝혔다. 집회 참가자들에게 나눠준 유인물엔 ‘헌재가 무고한 대통령을 탄핵한 것을 적법한 것으로 판결하는 순간 언론·국회·사법부·노조가 일으킨 정변이 성공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헌재의 결정을 인정할 수 없다’거나 ‘사법부의 김일성 장학생 종북좌파 판검사를 탄핵해야 한다’는 등의 상식을 넘어선 극단적 주장들이 담겨 있었다.

촛불 세력의 맞불 집회도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주관한 집회엔 ‘탄핵 지연 어림없다’ ‘박근혜·황교안 퇴진’과 같은 구호가 울려 퍼졌다. 출처가 불분명한 ‘지라시’엔 ‘헌재 기각은 민중이란 총의 격발기와 같다’거나 ‘탄핵을 기각하면 승복이 아니라 혁명’이라며 노골적으로 시민항쟁을 촉구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더욱 기가 찬 노릇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 중인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이 양심수로 둔갑해 정치공작의 희생양인 것처럼 선전되고 있는 사실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를 계기로 그간의 적폐를 바로잡아 대한민국을 리셋하자고 모인 촛불집회에서 ‘이석기 석방’ 구호가 들리는 퇴행적 상황은 정상은 아니다.

정치권의 행태는 더 개탄스럽다. 촛불과 태극기 세력이 마주 달려오는 기관차와 같이 정면충돌 직전인 데도 국론 통일에 앞장서야 할 정치권이 대선의 유불리에만 정신이 팔려 오히려 광장의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으니 말이다. 유력 대선주자를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이 각각 태극기와 촛불 세력에 편승해 자극적이고 극단적 발언을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탄핵심판은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른 헌재의 고유 권한이다. 따라서 헌재가 정치적 고려 없이 오직 증거에 입각한 최선의 결정을 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법치국가이며 선진국이다. 또 정치 지도자들이라면 당연히 법치주의 실현에 앞장서야 한다. 법을 만드는 국회가 스스로 헌법이 정한 절차를 훼손하거나 헌재를 압박하는 건 법치주의 수호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국회의원과 대선후보가 과연 나라를 정상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겠는가. 점점 극심해져 가는 대립 양상을 보면 헌재 결정이 어느 쪽으로 내려지더라도 극심한 혼란과 갈등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는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더 이상 불신과 반목의 곬이 깊어지지 않도록 리더십과 애국심을 발휘해야 한다.

박 대통령 역시 나라가 더 이상 도탄에 빠지지 않도록 애국적 결단을 내려주길 바란다. 지금 시중엔 박 대통령이 특검 수사와 헌재 재판에 협조하지 않고 태극기 세력의 힘이 결집되기를 기다리며 지연작전을 쓰고 있다고 의심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 이런 의혹이 확산될수록 국론 분열과 갈등만 확산될 뿐이다.

박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한 이래 한결같이 ‘애국심’을 강조해왔다. 지금이라도 특검 수사와 헌재 재판에 성실히 임함으로써 여론의 불신을 씻고 하루속히 정상적인 국가가 되도록 협조하는 게 박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애국일 것이다. 더불어 여권 일각에서 거론되는 ‘명예로운 퇴진’ 시나리오도 진지하게 고심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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