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빛의 속삭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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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29면

삶과 믿음

얼마 전 저녁밥을 먹고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딸이 문을 열고 소리쳤다. “아빠, 어서 나와 보세요!” “웬 호들갑이냐?” “지금 우주쇼가 시작됐단 말이에요.” 나는 딸의 손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갔다. 하늘이 잘 보이는 장독대로 올라서니, 먼저 휘영청 밝은 달이 보이고, 그 아래로 금성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둘 사이에 희미한 빛의 화성도 보였다.


매스컴에서 우주쇼라고 명명한, 달과 화성과 금성이 한 줄로 늘어선 빛의 장엄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래, 정말 놀랍고 멋지구나!” 행성들은 제각기 다른 중력과 공전주기를 가지고 있는데 나란히 열을 맞추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는 장독대의 항아리처럼 나란히 서서 놀라운 우주쇼를 지켜보다가 날씨가 너무 추워 방으로 들어와 식구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이 문득, 예로부터 점성학자들은 행성이 일렬로 늘어서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예언을 했다는데, 어떻게들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느닷없는 딸의 질문 때문에 우리는 모처럼 지구의 종말에 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점성가들이 말하는 지구의 종말뿐 아니라 종교에서 말해온 묵시적 종말이나 생태적 종말에 이르기까지 각자 자기 생각을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종말의 징후에 대해 이야기했다. 눈부신 첨단 문명의 도래로 숱한 장벽이 허물어지는 세상에 신(新)만리장성을 다시 쌓겠다는 미합중국, 그리고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가 지향하는 가치, 즉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세계가 재편되는 현상은 곧 종말의 징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모든 생명은 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네가 있기에 비로소 나도 존재할 수 있는 것. 당장 내 이익에 도움이 안된다고 너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결국 지구 생명을 파국으로 몰아가지 않겠는가.

눈 밝은 시인 고은은 말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둘이 하는 것/둘이 절반과 절반 이상으로 하는 것/사랑은 흉한 이익이 아닌 것/찬란한 손해 그것…”(‘다시 블라지보스또끄에서’)

그렇다. 타자를 부정하며 자기 이익을 취하는 것은 ‘흉한 이익’인 것이다. 흉한 이익을 취하기 위해 골몰하는 자의 내면엔 무자비가 터 잡고 있을 것. 시인이 사랑을 ‘찬란한 손해’라 했는데, 이처럼 손해를 감수하려는 자비심이 있을 때 지구 공동체는 파국을 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우리가 종교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우리 인류의 삶을 존속하도록 하는 최후의 가치는 사랑이요 자비인 것. 2000년, 2500년 전의 예수와 붓다가 피를 토하듯 사랑과 자비의 가치를 역설한 것은 지구 주민이 살 길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는 우주쇼가 펼쳐진 그날, 신비롭고 장엄한 빛 속에서 으밀아밀 속삭이는 빛의 속삭임을 들었다. 너희가 흉한 이익을 쫓아 살면 안된다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살면 너희의 미래가 없다고. 한 줄로 늘어선 달과 화성과 금성의 빛의 장엄은 어느 때보다 빛나는 눈망울로 공존공생의 가치를 상실한 철부지 인간들을 측은하게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싶었다.

고진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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