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북, 테러 지정국 피하려 공작원 대신 청부 암살 시도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519호 03면

[김정남 독살] 이정철 체포로 본 암살 사건의 재구성

말레이시아 경찰이 지난 17일(현지시간) 김정남 피살 사건 여성 용의자 2명(점선)을 데리고 쿠알라룸푸르 공항 터미널로 이동하고 있다. [AP=뉴시스]

말레이시아 경찰이 지난 17일(현지시간) 김정남 피살 사건 여성 용의자 2명(점선)을 데리고 쿠알라룸푸르 공항 터미널로 이동하고 있다. [AP=뉴시스]

김정남 피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북한 국적의 이정철이 체포됨에 따라 북한 배후설이 탄력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과거 요인 암살 사례와 비교할 때 이번 사건은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우선 6명의 일당 중 앞서 체포된 2명이 외국인이란 점이다. 외국인을 끌어들인 다국적 청부 암살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또한 이들 용의자의 범행 수법과 도주 행태가 어설프다는 점도 과거와는 다른 점이다. 베트남 여권을 소지한 여성 용의자인 도안티흐엉(29)은 사건 발생 48시간 만에 범행 현장인 공항으로 되돌아오는 바람에 붙잡혔다.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1983년)이나 KAL기 폭파 사건(1987년) 등 과거 북한이 저질렀던 테러 사건의 범인들이 자살을 시도했거나 극렬하게 저항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외국인 포섭해 2~3주 속성 암살교육 #베트남·인니·앙골라등 빈국 출신들 #북한 국적 이정철 체포 못했다면 #북 소행 못밝혀 미궁에 빠졌을 수도

정부 당국자는 18일 “북한이 2001년 9·11 테러 사건 이후 테러 방식을 바꿨다”며 “2010년께부터는 훈련된 공작원 대신 현지인을 활용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KAL기 폭파 사건 이후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다가 2008년 북·미 간 핵 검정 합의로 해제됐다. 이후 북한은 테러지원국에 지정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이 발을 뺄 수 있는 테러로 수법을 변경한 것이다. 이 당국자는 “북한이 ‘조선(북한)을 사랑하는 외국인’이라는 모임을 결성해 북한에 우호적인 외국인을 포섭해 2~3주 속성으로 암살 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이 모임에 가입한 외국인은 베트남·인도네시아·앙골라·이라크 등 아시아·아프리카 국가 출신들이다. 정부 당국자는 “이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어 북한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대로라면, 이번 사건의 결정적 용의자인 이정철(47)이 체포되지 않았다면 자칫 김정남 피살은 미궁에 빠진 채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거된 용의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김정남 피살 사건을 재구성해 미스터리를 짚어본다.

김정남 여행 패턴 파악 위해 1년간 추적

김정남은 지난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청사에서 다국적 암살 용의자들의 테러에 쓰러졌다. 현지 언론이 “범행에 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했을 만큼 부지불식간에 벌어졌다. 암살 용의자들은 치밀한 계획을 꾸몄다. 사건 나흘 만인 17일 네 번째 용의자로 북한 국적의 이정철을 체포한 말레이시아 경찰은 “용의자들이 지난 1년간 김정남의 여행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줄곧 그를 추적해 왔다”고 밝혔다. 현지 중문지 중국보는 “첫 번째 용의자인 베트남 여성 도안티흐엉과 두 번째 용의자인 시티 아이샤(25)가 범행 수일 전부터 각본에 따라 수차례 암살 동작을 연습했다”고 보도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여성 용의자들로부터 “각본을 만들고 암살 동작을 연습시킨 남성이 북한 사람처럼 보였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앞서 일본 후지TV는 “범행 바로 전날인 12일 쿠알라루품르 공항의 현장 근처를 여성 용의자 2명을 포함한 남녀 6명이 액체 스프레이를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 폐쇄회로TV(CCTV)에 포착됐다”고 전했다. 김정남 암살 작전을 위해 용의자들이 1년여간의 관찰과 수차례의 예행 연습을 거친 뒤 현장 답사까지 마쳤다는 얘기다.

인근 호텔에 묵으며 최소 네 차례 예행연습

김정남에게 직접적인 공격을 가한 베트남 여성 도안은 지난 4일 말레이시아에 입국했다. 범행 이틀 전인 11일 범행 장소인 공항 2청사로부터 13.9㎞, 차량으로 16분 거리의 큐래식(Qlassic)호텔에 투숙했다. 1박에 3만5000원 정도의 중저가 호텔이다. 현재 말레이시아 경찰이 추적 중인 검은 모자의 남성 용의자 A가 도안의 호텔비를 모두 현금으로 지불했다. 이날 A는 도안과 함께 공항으로 이동해 독극물이 없는 천을 건네주며 적어도 네 차례 이상 예행연습을 시켰다. 천으로 사람 얼굴을 덮었을 때의 주변 반응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범행 바로 전날인 12일 도안은 투숙 호텔을 바꿨다. 큐래식 호텔과 같은 블록의 시티뷰 호텔에 오후 2시쯤 체크인했다. 도안은 가위 한 쌍을 빌려 머리를 단발로 짧게 잘랐다. 18일 다시 찾아간 시티뷰 호텔의 매니저는 “콘택트렌즈가 많았다”면서 “짐가방과 손가방 그리고 테디베어가 손에 들려 있었다”고 도안의 인상을 전했다.

주말인 11일 도안을 포함해 아이샤와 다른 남성 용의자 4명 등 총 6명이 공항에 모여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현지 언론 더스타는 “공항 CCTV에 찍힌 이들 6명이 서로의 얼굴에 스프레이를 쏘면서 자못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전했다.

남성들은 50m 거리에서 공격 모습 지켜봐

사건 당일인 13일 오전 7시 도안은 시티뷰 호텔을 떠나 공항으로 향했다. A와 함께 쿠알라룸푸르 공항 제2청사 3층으로 들어온 도안은 비빅 헤리티지라는 식당에서 아이샤, 남성 용의자 B와 만났다. 이후 이정철과 남성 용의자 C도 잇따라 식당에 합류했다. A는 도안에게 독극물을 건넸다. 암살은 오전 8시59분, 단 5초 만에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도안은 A가 준 크림을 왼쪽 손에 낀 갈색 고무장갑에 바르고 김정남 뒤에서 얼굴을 가렸다. 그 사이 아이샤는 김정남 앞에서 액체를 뿌렸다. 남성 용의자 4명은 현장에서 50m 떨어진 비빅 헤리티지 식당에서 상황을 관찰했다. 김정남이 인포메이션 카운터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장면도 근거리에서 확인했다.

9시26분 공항 택시 정류장에서 아이샤의 남자친구가 운행하는 택시를 타고 시티뷰 호텔에 돌아온 도안은 체크아웃을 한 뒤 호텔을 떠났다. 도안은 역시 같은 블록의 또 다른 중저가 호텔 스카이스타 호텔에 오전 10시쯤 새로 체크인했다. 도안은 14일 오후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의료용 마스크를 쓴 채 호텔을 떠났다.

15일 오전 6시30분 도안은 공항 2청사에 다시 나타났다. 8시20분 경찰에 체포될 당시 도안은 여권과 항공권을 소지하지 않은 상태였다. 도안과 따로 도주한 아이샤는 15일 오전 쿠알라룸푸르 도심 4성급 플라밍고 호텔에서 체포됐다. 이정철은 17일 밤 셀랑고르주 잘란 쿠차이 라마 지역에 있는 아파트에 머물다 경찰의 급습으로 검거됐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CCTV와 검거된 용의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나머지 남성 용의자 3명을 추적하고 있다.

고수석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쿠알라룸푸르=김준영 기자 ko.soosuk@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