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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상황 굴절된 문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문화가 한 시대를 움직이는「내면적인 정신의 질서」라면 지난 20여년간의 문화현상을 보는 학자들의 시각은 부정적이다. 엄밀한 과학적 분석은 제쳐 두고라도 그간의 개괄적인 문화현상은 주체성을 획득하는데 다소의 문제점을 드러냈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는 개항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붕괴되면서 분열하기 시작한 우리 정신사가 그때그때 정치적, 혹은 경제·사회적 힘의 논리에 따라 문화선택을 강요당해왔다는, 또한 외국문화에 의해 전통문화가 끊임없이 훼손당해왔다는 우리 문화의 특수성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전문가는 해방이후 유교문화가 붕괴된 자리에 ▲미국실용주의▲사회주의사상▲일제식민주의잔재▲민족주의가 각각 대두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6·25라는 계기에 의해 정치적으로 채택된 미국문화는 자유민주주의 혹은 근대화라는 이름과 동의어가 되었고 처음엔 생활방식 속으로, 점차 사고방식까지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65년 한일국교 정상화는 이같은 미국문화 확산 시기에 또 다른 정치문화적 의미를 부여한다. 한일국교 정상화는 일본문화의 재상륙을 의미했고, 동시에 이에 대한 반발세력을 결집시킴으로써 훗날 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질 민족주의문화의 싹틈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한일국교 정상화는 미국 원조와 범행하는 일본의 경제협력을 불러들여 정신면이 미처 못 따라가는 고속성장으로 70년대 산업화사회의 문을 열었다. 이와 같은 산업화정책은 필연적으로 소외된 근로계층을 낳았고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운동과 민중문화를 결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민중문화는 문화현상이라기보다 전위적인 정치적 항거에 가까웠다.
72년 유신시대가 시작되면서 우리문화는 미국문화의 교조적 모방 풍조 속에서 이번에는 일본문화의 재침투까지 받게 되었다. 이인호교수(서울대·역사학)는 유신독재를 정당화한 「한국적 민주주의」의 모델이 다름 아닌 일본 군국주의였다고 진단, 당시 대중사회에서 일본의 저질문화가 판을 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보았다.
이같은 현상은 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하기 시작한 민족·민중문화운동이 생활문화라기보다 정치 투쟁적 계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며, 또한 정치가 기존의 권력구조에 맞지 않는 일체의 문화를 불온시해 온 문화행정과도 통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화가 주체성을 회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교수는 이를 위해 우선 문화세력 내부에 존재하는 갈등의 문제들을 하나씩 청산하여 새로운 문화질서를 형성함으로써 「이성」을 통해 극단논리를 피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새로운 문화의 모습은 우리가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외국문화를 또다시 무분별하게 추방한 모습은 아닐 것이며 복고적 유교문화 또한 아닐 것이다.
임희섭교수 (고려대·사회학)는 『과거 우리문화는 정의 문화였고 지금은 힘의 문화다. 이제는 힘과 힘의 갈등을 이성으로 극복하는 「이성의 문화」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또 윤사순교수(고려대·철학)는 『새로운 문화는 인존주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면서 이성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문화일 것이다』고 전망했다.
학자들의 이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베스트 셀러, 패션, 대중예술의 지난 22년간에 걸친 변모의 진폭을 엿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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