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추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인 남자가 어릴 적 경험했을 법한 어른들의 실없는 장난. "고추 어디 있나…"라는 뜬금없는 농담이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다가오는 투박한 손길도 감수해야 했다. 낯선 사람이라도 "애정의 표현"이라며 용인해 온 우리의 독특한 문화다. 사회학자들은 "유별난 남아선호 사상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남자 아이들의 '고추'를 만지는 행위에는 다산(多産)과 자손의 영속적 번영을 기원하는 일종의 규범의식적 성격도 있다.

하지만 놀림의 대상이 된 어린이의 입장에선 '성적 괴롭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아동학자들에 따르면 보통의 아이는 세 살이 되면 남자와 여자를 범주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여덟 살쯤에는 성(性)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 완성된다. 어린아이라고 수동적.피동적으로 성의 정체성을 체득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성에 적합한 지식들을 적극적으로 구성하고, 성역할과 관련해 신체적.정신적 발달을 이뤄나간다는 것이다. 특히 남자 아이의 경우 여섯 살쯤에는 프로이트가 주장한 오이디푸스콤플렉스(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에 대해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를 극복해 나간다는 이론도 있다.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해 어린이들의 성의 정체성은 이미 확보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학설이다.

여성단체 등에서는 "남성 우월주의에 근거한 특정 신체 부위 접촉은 도덕관념에 반하는 추행"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어린이들을 막연한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자발적인 권리의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일명 메건법(Megan's Law)에 근거해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주민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어린이들의 '성적 자기결정의 자유'를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다. 대법원이 "고추 어디 있나 보자"며 아홉 살짜리 남자 초등학생의 '고추'를 만진 혐의로 기소된 59세의 교사에게 유죄를 인정했다. "성적 수치심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킨 추행"이라는 것이 이유다. 재판부는 '고추'를 만지는 행위에 대해 "현재의 사회 환경과 가치기준, 도덕관념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어린이의 인격권을 보호한 의미 있는 판결인 것 같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까지도 법의 잣대에 의해 추행으로 몰리는 세상이 될까 두렵다. "고추 없어졌다"는 어른들의 너스레가 때론 그리울 때도 있다.

박재현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