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스토리] 싱가포르 성공신화 무너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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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10일로 건국 38주년을 맞은 싱가포르의 운명이 갈림길에 서 있다. 2000년까지만 해도 9.4%의 고도 경제성장을 보인 싱가포르는 올 2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마이너스 4.3%의 역(逆)경제성장을 보였다.

지난 1분기와 비교하면 11.8%나 추락한, 건국 이래 최악의 경제상황이다. 문제는 이 같은 상황이 올 초부터 이어진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이나 이라크전.발리 테러 등으로 빚어진 일시적인 현상 때문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아시안 월 스트리트 저널(AWSJ)은 지난 주말 논평에서 싱가포르는 10일 건국 38주년을 자축하겠지만 이제 좋았던 시절은 끝났다고 보도했다.

싱가포르 경제는 올 초의 악재들이 이어지기 전인 지난해 말에 후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3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3.9%를 보인 이래 4분기 3%, 올해 1분기 1.6%, 2분기 -4.3%로 급속히 식어가고 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도 지난달 싱가포르를 '한겨울을 맞은 사자(獅子:싱가포르의 상징)'로 비유하면서 싱가포르의 경제 성공 공식이 무너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싱가포르 경제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다국적 기업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 경제 위축의 대표적인 신호다. 지난 6월 미국의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 하니웰이 아태지역 본부를 싱가포르에서 상하이 푸둥(浦東)지구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컴팩.모토로라.내셔널반도체 등은 이미 싱가포르를 떠났다.

홍콩 경제일보는 지난 6월 상당수의 다국적 기업이 홍콩.싱가포르에서 상하이로 지역본부를 옮기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면서 저임금과 뛰어난 인프라를 내세워 싱가포르에 있는 다국적 기업의 지역본부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올 들어 사스 등 연이은 악재가 터지면서 경기 침체라는 중병을 급속도로 악화시키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올해 성장 전망치를 이전의 3.5~5.5%에서 0.5~1.5%로 대폭 낮췄다. 싱가포르 정부가 성장 전망치를 하향 조정한 것은 올들어 두번째다.

사실 싱가포르 사람들은 누구보다 이런 위기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2001년 이미 리콴유(李光耀)전 총리의 아들인 리셴룽(李顯龍)부총리를 중심으로 '싱가포르를 다시 만들자'는 의미의 경제심의위원회(ERC.Economic Review Committee)를 구성, 조사에 나섰다.

비효율적 금융구조, 정부 간섭, 국영기업 등이 개혁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 같은 요인 때문에 기업가 정신이 살아나지 않고 개인사업자에게 이렇다 할 사업 동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ERC는 이 같은 문제점 확인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아무런 개혁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미국 금융자문사 센테니얼 그룹의 마누 바스카란은 ▶비싼 땅값과 교통비용 등의 고비용 구조▶외부 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떨어뜨리는 정부의 지나친 역할▶정상적인 금융시장이 아닌 강제저축 제도를 통한 비효율적 투자 등 구조적인 문제를 개혁해야 싱가포르 경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싱가포르에서는 월급의 35%를 국영 연금기금에 의무적으로 저축해야 한다.

AWSJ은 지난 40년 동안 이어진 지나친 국가 주도 문화가 사회 전반에 수동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글로벌 경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창조적 사고와 정책 토론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촉통(吳作棟)싱가포르 총리도 최근 "싱가포르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공룡처럼 멸종할 것"이라고 말해 기존의 경제정책이 한계에 부닥쳤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9일 발표한 담화에서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단결해 경제 침체를 벗어나야 한다"며 "미국.일본 등과 자유무역협정을 촉진하고 국내 산업구조를 조정해 기업의 경영비용을 낮추는 구조조정을 끝내면 경제가 재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최준호 기자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 끝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서울시(6백5.5㎢)보다 약간 큰 6백82.7㎢의 땅에 세워진 도시국가다. 1965년 8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했다.

인구는 약 4백만명으로 중국계가 76.8%로 주류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은 2만8백87달러였다. 좁은 국토에 천연자원이 거의 없지만 국가 주도의 적극적인 개방 경제로 부를 축적했다. 외국인 투자가 총 국내 투자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사진설명전문>
지난 6월 말 싱가포르에서 쇼핑객들이 대대적인 세일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 밑을 지나가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사스 여파로 줄어든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수백만달러를 쏟아부었다. [싱가포르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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