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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내내 작전판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길이 보이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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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호 25면

[2017 스포츠 오디세이]
이랜드 FC 사령탑 맡은 김병수 감독의 ‘바둑 축구’
김병수 이랜드 FC 감독은 다리가 불편하지만 선수들과 함께 축구장 안에서 함께 뛰며 움직임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지적한다. 훈련은 1시간을 잘 넘기지 않는다. 작은 사진은 전술을 설명하는 장면. [사진 이랜드 FC]

김병수 이랜드 FC 감독은 다리가 불편하지만 선수들과 함께 축구장 안에서 함께 뛰며 움직임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지적한다. 훈련은 1시간을 잘 넘기지 않는다. 작은 사진은 전술을 설명하는 장면. [사진 이랜드 FC]

김병수는 강원도 홍천에서 소문난 축구 천재였다. 당시 실업축구 최강이었던 포항제철이 초등학교 5학년이던 그를 서울로 데려왔다. 꼬마 김병수는 포철 훈련장의 기라성 같은 선수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계속 움직이는 축구, 바둑만큼 심오 #무릎 꿇고 작전 지시, 신뢰 이끌어내 #“잘 만든 영화 보듯 설레는 팀 만들 것” #‘마라도나급 천재’ 부상 탓 27세 은퇴 #EPL팀선 한 명이 53.4초간 볼 소유 #빠른 패스 위주 점유 축구 돌풍 기대

 김병수는 경신고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평생을 따라다니는 발목 부상을 당한다 . 고려대에 입학해 4년 동안 그가 뛴 경기는 단 4경기. 그 중 세 번이 연세대와의 정기전이었다. “한 번만이라도 온전한 몸으로 경기를 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만신창이였지만 그의 천재성은 오히려 빛났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을 맡은 크라머 (독일) 감독은 “마라도나 이후 처음 본 축구 천재다. 독일로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1992년 2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전에서 김병수는 후반 추가시간에 그림 같은 발리슛으로 결승골을  터뜨린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올림픽 본선에 나가지 못했다. 그의 오른발목 인대는 1인치나 늘어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국내 프로축구(K리그) 드래프트를 거부한 김병수는 일본 2부리그 팀 코스모석유에서 다섯 시즌을 뛴 뒤 27세의 창창한 나이에 축구화를 벗는다. 고려대와 프로팀 포항 스틸러스 코치를 거친 그는 2008년 영남대 감독을 맡는다. 대학 축구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영남대는 2016년까지 9년 동안 7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 이명주ㆍ김승대ㆍ신진호 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배출됐고, 영남대는 프로들도 맞붙기를 꺼리는 팀이 됐다.

 2017년 1월, 김병수는 K리그 챌린지(2부) 서울 이랜드 FC 감독으로 취임한다. 2015년 창단한 이랜드는 외국인 감독을 모셔와 야심차게 출발했지만 두 시즌 동안 K리그 클래식(1부)으로 승격하지 못했다. 2016년 성적은 12개 팀 중 6위였다.
 김병수 축구는 ‘빠른 패스와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볼 점유율을 높이며 끊임없이 상대 골문을 노리는 축구’로 요약할 수 있다. ‘패스 앤드 런(pass and run)’을 추구하는 FC 바르셀로나(스페인) 스타일과 닮았다.

“동료 믿고 활용하는 게 좋은 축구”

 “볼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 공유하는 거다. 볼을 공유하면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동료끼리 우정을 나누게 된다.” 김 감독의 지론이다. 플레이 중에 동료가 고립되게 놓아두지 말고, 서로 도와주고 의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 감독은 영남대 선수들이 볼을 공유하면서 우정을 나누는 모습을 자주 봤다고 했다.

 스포츠 통계업체 옵타(OPTA)에 따르면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팀은 경기당 평균 650회 볼을 터치한다. 선수 한 명당 59회, 볼 소유 시간은 53.4초다. 한 선수가 볼을 간수할 수 있는 시간은 한 번에 1초가 안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볼 점유율을 높이려면 동료들이 계속 움직이면서 좋은 자리를 선점해 패스가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선수들이 몸을 푸는 동안 김병수 감독이 태블릿 PC의 작전판을 보며 전술을 구상하고 있다. 제주=정영재 기자

선수들이 몸을 푸는 동안 김병수 감독이 태블릿 PC의 작전판을 보며 전술을 구상하고 있다. 제주=정영재 기자

 김 감독은 일본 코스모석유에서 뛸 때 이 ‘진리’를 깨쳤다고 한다. “심한 마크를 당해 전반에 볼을 두세 번 밖에 터치를 못했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은 겁니다. 한 번도 실수를 안 했거든요. 그때 ‘아, 나 혼자 뭔가를 한다는 건 참 어리석구나. 동료를 믿고 활용해야 하는구나’ 깨달은 거죠. 2골을 넣어 내가 승리를 책임졌다고 우쭐했던 경기 동영상을 보니 오히려 실수가 너무 많고, 실수해 놓고는 동료 탓을 하더라고요.”

 볼 점유율이 높은 팀이 유리하다는 건 현대 축구에서 상식으로 굳어졌다. 점유율이 높은 팀이 이길 확률은 39.4%, 낮은 팀이 승리할 확률은 31.6%라는 통계도 있다. 네덜란드 축구황제 요한 크루이프는 “볼을 소유하고 있으면 상대는 절대 득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어떻게’ 점유율을 높일 것인가다. 여기서 ‘디테일’이 나온다.

 김 감독은 공을 가진 선수, 패스를 받을 선수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직접 시연한다. 오른다리를 절뚝이면서 경기장을 뛰어다니고, 왼발로 패스 시범을 보인다. 일본ㆍ포르투갈 등에서 뛴 김병석 선수는 “보통 지도자들은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해 놓고 막상 구체적인 상황이 닥치면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한다. 감독님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엄청 디테일하게, 그리고 쉽게 설명해 주신다”고 말했다. 국가대표 출신 골키퍼 김영광 선수는 “뒤에서 보면 패스 길이 막히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감독님이 길을 찾아내시더라. 신기하기도 하고, 이걸 우리가 제대로 해내기만 하면 무서운 팀이 되겠다는 기대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병석은 “그라운드 안의 모든 상황이 감독님 손 안에 있는 느낌이다. 우리는 마음먹은 대로 공을 돌리고, 상대는 ‘에이 씨’ 하면서 공을 쫒아다닌다”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축구는 아무리 파고들어도 끝이 없다. 문제가 풀렸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생겨서 몰입하게 만든다. 죽는 날까지 이 일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의문점을 풀기 위해 축구 이론서나 전술서를 참고하는지 물었다. 그는 “남이 제시한 해법으로 내 문제를 풀 순 없다. 세 시간 동안 작전판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길이 보인다”고 했다. “축구를 바둑 두듯이 하는 것 같다. 축구가 바둑보다 심오한가” 물었더니 “그런 면이 있다. 바둑에서 한 번 놓인 돌은 움직이지 않지만 축구는 22개 돌(선수)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무쌍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 내가 이렇게 나오면 상대가 저렇게 나오고, 그럼 또 나는 다른 쪽으로 받아쳐야 한다”고 말했다.

 이랜드 FC는 제주도에서 합숙훈련 중이다. 내가 제주도에 내려온 날도 김 감독은 선수들이 몸을 푸는 동안 태블릿 PC로 작전판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격려 방문’을 한 축구단 한만진 대표와의 저녁 자리에서도 김 감독은 밥을 후다닥 먹고 먼저 일어섰다. 나중에 물어 보니 “낮부터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이 퍼뜩 떠올라 잊어먹기 전에 내 방으로 올라갔다. 난 밥을 빨리 먹는 편”이라고 했다.

 다음날 중국 프로축구 2부리그 베이징 쿵구와의 연습경기가 열렸다. 1년 예산이 500억원을 넘는 팀이고, 외국 용병 3명이 다 뛰었다. 이랜드는 김 감독과 손발을 맞춘지 보름 남짓, 용병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스코어는 1-1이었지만 점유율은 8대2 게임이었다. 이랜드 선수들은 자유자재로 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를 농락했다. 나흘 뒤 열린 스좌장 융창과의 연습경기에서도 이랜드는 8대2 게임을 하며 1-0으로 이겼다. 스좌장은 지난해 1부에서 강등됐지만 1년에 1000억원을 넘게 쓰는 팀이다.

“내가 싫어했던 일 선수들에게 안 시켜”

 이랜드 선수단 숙소인 켄싱턴 리조트에서 김 감독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K리그 클래식 팀 선수 3명이 찾아왔다. 영남대 시절 제자였던 그들은 “동계훈련 마치고 내일 올라갑니다. 병수쌤 얼굴이라도 뵙고 싶어서 왔어요”라며 커피값을 냈다.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스트레스 주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는 “내가 선수 때 하기 싫었던 걸 안 시키는 것 뿐”이라고 했다. 훈련 끝나 파김치가 된 선수들 오래 잡아놓고 미팅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부족한 부분은 그때그때 훈련하면서 고쳐주면 된다. 그 순간 못 깨달으면 끝이다. 선수와 지도자가 너무 밀착되는 것도 좋은 게 아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훈련이나 경기 때 한쪽 무릎을 꿇고 작전을 지시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선수들은 존중과 배려의 느낌을 받는다. 감독으로서는 시선을 끌어들여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할 수 있다.

 김 감독은 요즘 선수들이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게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진 패스를 할 수 있음에도 꼭 백 패스를 하는 선수들이다. “앞으로 가면 뺏길까 봐 뒤로 패스하는 선수들이 더 많이 실수한다. 앞으로 패스를 하면 자신감이 생기고 실력이 향상된다”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김병수라는 이름 앞에는 꼭 ‘비운(悲運)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운이 없는 게 아니라 선수를 조금 일찍 끝냈을 뿐이라고, 천재가 아니라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짬뽕 만드는 사람도, 초밥 만드는 사람도 1만 시간 집중하면 달인이 될 수 있다. 외국 축구장 가면 ‘얼마나 재밌을까’ 설렐 때가 많다. 우리 팀 팬들이 잘 만든 영화를 보기 전의 설렘 같은 걸 느낄 수 있도록, 힘들겠지만 끊임없이 노력할 거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김 감독은 몇 번이나 “기사 톤을 제발 좀 낮춰 달라”고 부탁했다. 데뷔전도 안 치른 프로 초년생 감독이 ‘축구 철학’ 운운하는 게 좋게 보일 리가 없다는 거다. 자기 얘기를 하다 보면 ‘저 팀은 저런 전술ㆍ전략으로 나오겠구나’ 하고 상대에게 패를 보여주는 셈이 된다고도 했다.

 K리그 챌린지는 3월 4일 개막한다. 김병수 감독이 ‘바둑 축구’의 완성도를 얼마나 높여 놨을지, 서울 이랜드 FC가 ‘농구같은 축구’를 구현할 수 있을지 심히 궁금하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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