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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과거의 유산이 혁신의 걸림돌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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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호 21면

2차대전사로 보는 기업 경영 <끝> 전함 야마토와 노키아의 비극
1945년 4월 구레 군항 인근에서 야마토가 미 해군 항공모함 호네트의 함재기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US Naval Historical Center

1945년 4월 구레 군항 인근에서 야마토가 미 해군 항공모함 호네트의 함재기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US Naval Historical Center

1945년 4월 6일 일본 해군을 상징하는 전함 야마토는 토쿠야마에서 출항해 최후의 항해를 시작했다. 솔로몬 제도와 필리핀에서 전투함과 항공력을 소진한 일본 해군은 더 이상 미 해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4월 1일부터 미군이 오키나와 공격을 시작하자 야마토는 60%의 연료와 1170발의 주포탄을 싣고 '천 1호(텐고) 작전'에 나선 것이다. 순양함 1척과 구축함 8척만이 야마토를 호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야마토의 출항은 B-29를 개조한 장거리 정찰기에 이미 포착됐고 일본 근해를 벗어나기도 전에 미 해군 잠수함도 이를 확인했다. 보고를 받은 제5함대 사령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은 항공모함 중심의 제58 기동부대를 지휘하는 마크 미처 제독에게 공습을 명령했다.

세계 최대 함포 단 야마토급 전함 #항모 시대 적응 못해 후방만 전전 #이렇다 할 전과 없이 비참한 최후 #휴대전화 50% 장악했던 노키아도 #스마트폰 생태계 구축 못해 몰락

7일 오후 12시30분 야마토 함대 상공에 도착한 280대의 미 해군 전투기와 급강하폭격기, 뇌격기가 37분부터 공격에 들어갔다. 4분 후 두 발의 폭탄이 야마토에 명중한 것을 시작으로 대규모 공습이 이어졌다. 첫 공습에서 4발의 폭탄을 얻어 맞은 야마토는 부포탑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면서 대공 방어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공습 두시간만에 두토막 나며 침몰
1941년 10월 시험항해에 나선 전함 야마토. US Naval Historical Center

1941년 10월 시험항해에 나선 전함 야마토. US Naval Historical Center

이어 4발의 어뢰가 명중하면서 야마토는 좌현으로 16도 기울어진 채 속도가 시속 18노트(30㎞)까지 떨어졌다. 2시간 동안 이어진 공습으로 최소한 6발의 폭탄과 11발의 어뢰를 얻어맞으면서 결국 엔진이 정지되고 조함이 불가능해지자 오후 2시 30분 승무원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후 2시 23분 첫 공습에서 난 화재가 주포 탄약고로 옮겨붙으면서 대폭발을 일으켜 순식간에 두동각으로 갈라져 침몰했다. 폭발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6㎞까지 솟아오른 버섯구름을 160㎞ 떨어진 큐슈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야마토 최후의 전투에서 미군은 F6F 헬캣 전투기 3대, SB2C 헬다이버 급강하폭격기 4대, 어벤저 뇌격기 3대가 격추됐되면서 조종사 4명, 항공승무원 8명이 사망했다. 반면 일본군은 야마토에서 3055명, 함께 침몰한 순양함 야하기와 4척의 구축함 등에서 1187명이 전사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했던 야마토는 초라한 모습으로 거함거포주의의 종말을 알렸다.

1937년 구레 해군공창에서 건조를 시작한 야마토는 1940년 8월 8일에 진수됐다. 정식으로 취역한 것은 진주만 기습 다음 주인 1941년 12월 16일이다. 지금까지 배에 실린 것으로는 가장 큰 구경 18.1인치(46㎝ )함포 9문을 탑재한 전장 263m, 전폭 38m의 거대 전함으로 기준 배수량 6만5000t, 탄약과 연료를 가득 채운 만재 배수량은 7만t에 달한다. 16인치 주포를 장착한 미 해군의 아이오와급 전함이 4만5000t, 최대 100대의 항공기를 싣고 다니는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이 1만9800t 수준이다.

각종 장비도 최신예였다. 사격통제장치는 렌즈간의 거리가 일반 전함의 세배인15.5m에 달하는 일본광학(니콘) 특별제작품인 광학측거의를 달았고, 100㎞ 떨어진 항공기를 탐지할 수 있는 레이더도 장착했다.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승무원들의 생활 시설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장교 뿐 아니라 수병들까지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침대를 구비했고 식료품 보관용 대형 냉장고도 있었다.

1942년 트럭섬에 정박중이던 야마토를 방문한 대본영 참모 츠지 마사노부 중령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과의 면담 후 도미회와 차가운 맥주를 대접받아 감격했다고 회고했으며 야마토 침몰시 전사한 한 수병은 "카레라이스가 맛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걸 먹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침몰한 날의 저녁식사 메뉴로 팥찰밥 통조림과 쇠고기 통조림이, 야식으로는 단팥죽이 준비됐다고 한다. 일본 해군 장병들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최고급 호텔 체인 이름을 빌어 야마토 호텔이라고 불렀으며 자매함인 무사시도 무사시 료칸이란 별명이 붙었다.

44년 말에야 처음으로 적함에 포격
하지만 이런 별명은 태평양 전쟁 기간 중 대부분을 트럭섬에 정박해있던 것을 조롱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일본이 야마토와 자매함 무사시 시나노(후에 항공모함으로 개장)를 건조한 이유는 물량으로는 당해내기 어려운 미 해군을 한척 한척이 강력한 전함으로 압도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기대와는 달리 태평양은 거대한 전함들이 포화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항공모함의 함재기가 지배하는 전장이 됐다.

화려한 스펙과는 달리 야마토는 뒤떨어지는 일본의 철강기술 탓에 장갑 방어력은 기대에 못미쳤고, 주포의 정확도 역시 떨어졌다. 대공 화력도 부족해 미 해군 함재기와 맞서 싸우기도 마땅치 않았다. 일본 제국의 상징이랄 수 있는 야마토가 일선에 나섰다가 큰 피해를 보기라도 하면 곤란하기에 일본 군부는 야마토를 후방으로 돌렸다.

첫 출전은 1942년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 된 미드웨이 해전이었다. 연합함대의 기함으로 나선 야마토는 항공모함 간의 함대전을 뒤에서 구경만 하다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듬해 12월 25일에는 트럭섬으로 향하는 수송선단을 호위하다 미국 발라오급 잠수함 스케이트에게 어뢰 한 발을 얻어맞아 구레로 돌아가 몇개월 동안 수리를 받아야 했다. 겨우 수리를 끝내고 나니 이미 태평양에는 미군의 전함과 항모 잠수함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전력보존이란 명목 하에 계속 후방으로만 돌게 됐다.

야마토가 미 해군을 상대로 첫 주포를 발사한 것은 1944년 10월 레이터 해전에서다. 24일 아침부터 미 함재기들의 공격을 받아 폭탄 2발을 맞고 빠져나왔지만 자매함인 무사시는 어뢰와 폭탄을 각각 10발 이상씩 얻어 맞고 1039명의 승무원과 함께 격침됐다. 이튿날 미 호위항모 갬비어베이를 공격해 명중탄을 냈지만 구축함 히어만이 발사한 어뢰에 쫒겨 전역을 이탈했다.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1척의 호위항모와 3척의 구축함을 격침시켰지만 미군 함재기의 공격으로 순양함 3척이 피해를 입게되자 후퇴했다. 야마토는 6개월 후 오키나와로의 마지막 여정에 나설 때까지 본토의 항구에 묶여 있게 된다.

노키아도 심비안 집착 등 오판으로 좌초
야마토의 비참한 최후는 한 곳에 모든 것을 걸고, 주변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자존심과 이미 투입된 자원 때문에 포기하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이 불러오는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다. 세계 최대 휴대전화 업체였던 노키아의 몰락은 기업 경영에도 비슷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금은 실감하기 어렵지만 노키아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말 그대로 절대 강자였다. 1989년 미국 모토로라를 누르고 세계 시장 1위에 오른 노키아는 1990년대 전세계에서 스마트폰을 포함한 휴대전화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했다. 스마트폰 분야에서도 노키아의 심비안 플랫폼은 40%를 넘었다.

하지만 2007년 애플의 등장으로 노키아의 추락은 시작됐다. 노키아의 스마트폰 플랫폼인 심비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 4분기 44.4%에서 2011년 2분기에는 22%로 반토막났다. 낡은 심비안은 새로운 터치식 UI에는 맞지 않았다. 앱 시장인 오비(OVI)스토어는 애플 앱스토어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자체 지도 역시 구글맵에 주도권을 넘겨줬다. 노키아는 2010년 마이크로소프트(MS) 출신의 스티븐 엘롭을 최고경영자(CEO)로 영입했다. 엘롭은 취임 일성으로 “불타는 플랫폼에서 뛰어내리라”며 심비안 대신 윈도폰을 새 플랫폼으로 삼았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와 플레이스토어로 애플에 대항하는 개방형 스마트폰 생태계를 꾸린 구글 대신 MS를 선택한 이 결정은 노키아 스마트폰 사업에 치명타가 됐다. 2013년 노키아는 결국 휴대전화 부문을 MS에 매각했다. 노키아의 몰락은 하드웨어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경쟁력 없는 플랫폼 기반으로는 세계 일류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항공모함이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수백대의 함재기가 하늘을 지배하는 환경에서 야마토가 몰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돌이켜보면 노키아에도 최소한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아이폰이 나왔을때 심비안을 개방해 열린 생태계를 구축했거나, 심비안을 포기했을때 윈도폰 대신 안드로이드를 채택했다면 아직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자체 플랫폼이 없던 삼성전자가 윈도폰에 이어 재빨리 안드로이드 진영에 합류하며 스마트폰 시장에서 선두권을 지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성공적인 과거의 유산이 오히려 미래로의 변화를 가로막은 안타까운 사례일 것이다.

 김창우 기자 changwoo.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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