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전문가 5인이 본 ‘트럼프발 통화전쟁’
“중국과 일본이 수년간 환율조작” #트럼프 일갈에 원·엔 가치 4% 올라 #중국을 환율조작국 지정할 경우 #중간재 수출 비중 높은 한국 타격 #EU 선거, 美 예산안은 강달러 요인 #제2의 플라자합의 가능성 크지 않아
#2. 천안에서 케이블 부품 수출업체를 경영하는 하모(65) 사장은 요즘 고민이 많다. 미국·유럽 등지에서 지난해 말 주문받은 물량을 생산하는 동안 미국 달러 가치가 5% 이상 하락하는 바람에 3000만원 가까이 손해를 봤다. 달러로 대금을 받는 수출기업이다 보니 달러 가치가 높을수록 이익이 커진다. 그는 "앞으로도 달러 약세로 이어진다면 손실액이 커질 수 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올해 들어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갑자기 치솟은 건 통화전쟁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시작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이다. 취임 전인 지난달 16일 월스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지나친 달러 강세로 미국 기업이 경쟁할 수 없다"고 주장한데 이어 같은 달 31일엔 "중국과 일본이 수년간 환율을 조작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통화전쟁은 제로섬 게임에 가깝다. 누군가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자국 통화 가치를 끌어내리면 다른 한쪽에선 손실을 입기 때문이다. 환율전쟁이 대표적인 근린궁핍화(Beggar-my-neighbor) 정책으로 꼽히는 이유다. 트럼프의 환율조작 발언 당일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미국 달러의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하루새 0.9% 하락한 99.48을 기록했다. 반면 원화를 비롯해 엔화, 대만 달러 가치는 올해 들어 4% 이상 올랐다.
환율전쟁이 벌어지면 한국 경제는 곧바로 수출 기업의 이익 감소라는 빨간불이 켜진다.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면 국내 수출기업은 간접적인 타격도 받는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5%(1244억 달러)다. 특히 대(對)중국 수출에서 반도체·부품 등 중간재는 70% 이상을 차지한다. 중국의 대미 수출이 주춤하면 상당수 국내 기업이 악영향을 받게되는 것이다.
이달 9일 국제통화기금(IMF)은 트럼프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통화전쟁에 대해서 우려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대책없이 안심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 5인의 금융 전문가에게 외환 시장과 관련된 4가지 궁금증을 물어봤다.
궁금증1. 독·중·일 환율조작국 지정될까.
반대 의견도 있다. 이상재 유진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중국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될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수년간 일자리를 잃고 고통받은 저학력 백인 근로자 중심의 지지층을 다독이기 위해서라도 중국에 대한 압박 정책을 내놓을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궁금증2. 플라자합의 재현될 가능성은.
트럼프 대통령이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을 롤모델로 삼고 있어 1985년 플라자합의를 재현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심각한 무역적자를 겪은 것은 비슷하지만 과거처럼 합의를 이끌어내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답변이다. 레이건 정부는 경상수지와 재정수지 적자가 동시에 나타나는 쌍둥이 적자에 시달렸다. 1985년 9월 22일 미국을 비롯해 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주요 5개국(G5) 재무장관이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 모여 ‘미 달러 가치를 내리는데 노력하고, 재정·통화 정책을 공조’하기로 합의했다. 회의 다음날 달러당 엔화 가치는 9% 올랐고, 1년 뒤에는 34% 올랐다. 엔고는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으로 들어선 계기가 됐다.
홍춘욱 팀장은 "당시엔 소련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어 미국 경제를 살리는 데 각국이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면서 "지금은 각국 이해관계가 엇갈린데다 미국 경제만 홀로 회복단계로 들어섰기 때문에 과거처럼 도움을 받긴 어렵다"고 분석했다. 유승민 팀장은 플라자 합의는 실패한 정책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당시 레이건 정부는 엔고를 유도하면 대일 무역적자가 해소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사실상 해결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궁금증3. 달러흐름을 바꿀 새 변수는.
유럽이 문제다. 세계적으로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면 안전자산인 달러 수요가 늘면서 값이 오른다. 유럽의 첫번째 화약고는 프랑스 대선이다. ‘프랑스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에 대한 지지율이 높아지고 있다. 백석현 이코노미스트는 "르펜의 핵심 공약이 반(反)이민·반세계화·반이슬람인데다 브렉시트를 따라 취임 후 6개월 안에 프랑스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묻는 국민투표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며 "프랑스 대선 결과가 유로존 금융시스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지속적인 통화완화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는 독일도 눈여겨 봐야 한다. EU 통계청에 따르면 유로존의 1월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1.8% 올랐다. 약 4년 만에 ECB 목표치 2%에 근접했다. 유로존 최대 경제국인 독일은 이미 2%를 넘어섰고, 물가 압력이 점차 커지면서 ECB에 금리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독일도 올해 9월 총선을 앞두고 있어 ECB를 비판하는 정당들의 지지기반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궁금증4. 트럼프 예산안 발표 영향은.
예산안은 트럼프 정책 노선이 구체적으로 담기기 때문에 중요하다. 트럼프 당선 이후 달러 강세를 이끌었던 가장 큰 요인이 막대한 재정 지출과 인프라 투자다. 규정대로라면 2월 첫번째 화요일(6일)까지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해야 한다. 제출 시기가 지났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유안타증권에 따르면 대통령 취임 첫해엔 지연되는 사례가 많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월 26일에 제출했고 조지 부시 전 대통령도 2월 28일 보낸 뒤 보다 구체적인 예산안은 4월 9일 다시 송부했다.
이상재 투자전략팀장은 "트럼프의 경기 부양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오히려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승지 연구원 역시 인프라 투자 규모도 변수로 작용한다고 덧붙였다. 외신에 따르면 트럼프는 대선 과정에선 1조 달러에 이르는 인프라 투자를 제시했지만 당선 이후 홈페이지에선 절반 수준인 5500억 달러를 언급했다.
반면 백석현 이코노미스트는 세제 개편안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달 9일 트럼프는 항공사 경영진과의 간담회에서 "미국 기업의 세금 부담을 낮추는 것은 중요한 사안으로 2~3주 안에 깜짝 놀란 만한 내용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선기간부터 현행 35%인 법인세를 15%로 낮추는 동시에 소득세율을 내리는 등 폭넓은 감세를 약속했다. 백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는 대외적인 메시지로 달러 약세를 강조하고 있지만 감세, 인프라 투자 같은 정책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달러 강세를 용인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