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작가전] 시뮬라크르 #12. 무채 계열의 빨강 (5)

중앙일보

입력

시몬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지하철역의 잔류 부랑자들이 호시탐탐 가게와 집을 노렸다. 날마다 전쟁이었다. 저쪽의 기력이 완전히 소진되기 전까지 전쟁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푸코는 이쪽에서 먼저 쳐서 아예 뿌리를 뽑자고 우겼지만 루가 망설였다. 막아내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먼저 쳐들어가서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칼질을 할 때마다 살점을 베고 뼈를 부수는 손의 감각이 점점 더 끔찍해지고 있었다.
그사이에 대체 연료를 알아보러 갔던 현 회장이 B 지구에서 두 대의 오염도 측정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연료는 어찌 되었는지 아들인 태수에게조차 말을 하지 않았다.
외출 금지 명령을 받아서 한동안 나올 수 없었던 태수가 어느 날 몰래 집을 빠져나와 가게로 왔다. 루와 푸코가 질겁하여 쫓아 보내려 했지만 태수는 뺀질거리며 말을 듣지 않았다. 태수네 집 사람들에게 들키면 태수보다도 루와 푸코가 경을 칠 게 뻔했다. 게다가 부랑자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태수까지 휘말리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 그러잖아도 수비대 쪽에서 푸코를 불러 아무리 상대가 부랑자들이라지만 더 이상은 봐 줄 수 없다고 잔소리를 하고, 시장 어른들도 슬슬 한 마디씩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웬만하면 일이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몸을 사려야 할 판에, 태수는 새로운 정보가 있다는 핑계로 가게에 죽치고 앉아 갈 생각을 안 했다.

“네 정보 따위 하나도 안 궁금해. 너희 아버지가 측정기를 가져왔든 말든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고. 그러니까 제발 가라, 응?”

“너는 관심 없을지 몰라도 푸코 형은 아닐걸.”

“나도 관심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수는 집안에서 엿들은 말들을 주절거리며 전했다. 현 회장이 가져온 측정기를 며칠 전 시장이 와서 가져갔다고 했다. 한 대는 외곽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인 남쪽 샛강의 다리를 차단하여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을 검역하고, 나머지 한 대는 도시 내의 사람들을 검역하여 선별해낼 계획이라고 했다.

“새삼스럽게 왜?”

루가 물었다.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몰라.”

“그렇게 해서 뭘 어쩌겠다고?”

“나도 모른다니까.”

“지랄들을 해요.”

“그런데 진짜 중요한 정보는 따로 있어.”

“뭐?”

“며칠 뒤에 시장이 중대 발표가 있다면서 모이라고 할 거래. 절대 나가면 안 돼. 알았지? 특히 루, 너는 진짜 가면 안 돼.”

“내가 왜?”

“시몬은 집에 있어?”

“응, 벙커에.”

“좀 괜찮아?”

“이제 혼자 일어나서 움직여.”

“시몬도 절대 내보내지 마. 이제 지하철역 노인네들이 문제가 아니게 됐다고.”

“대체 뭔 말이야.”

“더 이상은 말 못해.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어.”

푸코도 잠자코 태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표정도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태수의 말대로 며칠 뒤 시장은 중대 발표가 있다면서 사람들을 대형 샘터가 있는 광장에 모이게 했다. 루도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나가보려 했지만 푸코에게 붙들려 나가지 못했다. 푸코는 한술 더 떠서 시몬과 함께 루를 지하 벙커 속에 밀어 넣고 밖에서 문까지 잠가버렸다.
얼결에 밀려들어온 루는 두터운 철문을 두드리며 악을 썼다. 시몬은 그런 루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다 낫지 않은 다리를 절뚝이며 구석에 쌓아 둔 비상식량을 가져다 루에게 먹을 테냐고 묻기도 했다. 루는 그런 시몬에게 종주먹을 들이대며 신경질을 부렸다. 천정에 붙은 환기구를 열고, 거기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루는 구석 자리로 가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저녁때가 돼서야 돌아온 푸코의 얼굴이 사냥꾼에게라도 잡혀갔다 온 사람처럼 질려있었다. 태수가 말한 그대로가 중대 발표의 내용이었다.
시장은 발표 내용을 말하기에 앞서 한 장황한 연설에서, 심각한 오염 지역으로부터의 도시 내 유입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이대로라면 지구 상의 인류가 완전히 멸종될 것이라고 협박했단다. 그리고 이어 검역 방법과 기준치를 발표하고, 기준치 이상으로 오염된 자는 B 지구의 시설로 보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조처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검역에 협조하라고 회유했다.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물론 아무도 없었다.
모여 선 군중들이 술렁이는 사이에 그 자리에서 바로 측정을 시작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느새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수비대와 군인들에 의해 강제로 측정된 사람들은 선별되어 끌려가고, 도망치기 위해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은 본보기로 그 자리에서 베어졌다. 서둘러 문을 닫았던 광장 주변의 집들과 상점들도 숨을 곳을 찾아 뛰어든 사람들과 쫓는 군인들에 의해 부서졌다. 골목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시작됐다. 푸코는 대부분 얼굴을 익혀 알고 있는 수비대와 군인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지금도 광장은 오도 가도 못하고 검역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아주 난리도 아니라고 했다.

“갑자기 왜?”

“모르겠다. 뭔지 모르겠지만, 뭘 또 새로 정비한답시고 한바탕 청소를 하려나 보다.”

“미친!”

“당분간 어디 나갈 생각하지 말고, 시몬이랑 여기 꼭 박혀 있어.”

시몬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급히 낡은 성경을 찾아 품에 꼭 안았다. 큰 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루도 겁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푸코를 만나 할아버지와 함께 도시로 들어와 정착할 무렵, 잔류 사냥꾼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불어닥쳤던 광풍을 루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의 시장이 추대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수비대가 늘어나고 B 지구로부터 새 무기들이 들어왔다. 거리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 시장과 측근들까지 사냥꾼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그들이 모두 사냥꾼 일당이거나 언제든 본색을 드러낼 수 있는 잠재적 사냥꾼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새 정부가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믿는 척이라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뿐이었다. 광야에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할아버지와 루도 사냥꾼으로 몰려 죽을 뻔한 것을 푸코가 원래는 거리의 친구들이었던 수비대원들과 암시장 어른들의 도움으로 빼돌렸다. 광야로부터 계속 유입되어 포화상태였던 도시 내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 이후에야 도시는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런데 그 짓을 또 하겠다는 것이었다.
광장의 혼란은 곧 도시 전체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집집마다 검문이 강화되고 수비대와 시민들 사이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계속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묶여서 끌려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목격되고, 외곽으로 나가는 손수레에 실린 것은 대부분 사살된 시체들이었다. 화장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풍부한 사료와 탈출을 시도하는 신선한 먹이들로 샛강의 물고기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순식간에 개체 수를 늘렸다. 먹성 좋은 그놈들이 미처 다 먹지 못하고 남긴 몸뚱어리들이 남쪽 다리 밑으로 떠내려갔다. 형제와 친구와 부모와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창의 덧문을 닫고 현관문의 빗장을 단단하게 질렀다. 오염도가 높은 사람들은 광야로 호송되어 산 채로 묻힌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측정기가 먼저 도입된 B 지구에서 도망쳐 온 이의 말이니 아주 못 믿을 소문만은 아닌지도 몰랐다.

지하철역 부랑자들도 죄다 잡혀가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어딘가로 숨어들어서 전쟁은 예기치 않게 끝이 났다. 여행자인 루도 함부로 나돌아다닐 처지가 아니었다. 루처럼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면 누구든 정부가 정해서 발표한 기준치를 훨씬 넘을 게 뻔했다. 그래서 태수가 루더러 광장에는 절대 나가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이었다. 당연히 트럭을 가지러 가는 일은 무산되고 헬리콥터를 보러 가는 일도 없던 일이 되었다. 태수는 더욱 집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되었고 루는 점점 더 자주 벙커 속으로 숨어 들어가야 했다.
물건의 반입에 대한 기준치가 발표되고 오염 물질이 가장 많이 검출되었다는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의 통행마저 통제되자, 도시는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유입되는 모든 물품이 검역을 통해 인증을 받아야 하고, 눈비가 내리는 날에는 집안의 문을 걸어 잠그고 절대 밖으로 나오면 안 되게 되었다.
도시의 곡식과 생필품이 동나기 시작했다. 목숨을 걸고라도 탈출하려는 무리들이 많아지며 샛강으로의 접근마저 금지됐다.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샛강 건너의 화장장도 자연스럽게 수비대에게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키워 시장으로 공급하던 물고기마저 정부의 관리 하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말썽을 일으키기 싫어서 벙커 속으로 숨어들기는 했지만 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검역이라니. 어차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오염되어 있었다. 심하게 오염된 사람들은 벌써 오래전에 죽었고 또 죽어가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외관상으로도 식별이 쉬워 발견 즉시 모두 광야로 쫓겨나거나 처벌됐다. 덜 오염된 사람들도 10년, 20년, 30년 후면 다 죽을 게 뻔했다. 그 와중에도 오염된 아이들이 태어나고, 또 죽었다. 그중에 살아남은 아이들이 자라서 오염된 아이들을 낳고, 오염된 아이들이 또 오염된 아이들을 낳을 것이다. 그렇게 이어가다 보면 오염에 익숙해져서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게다가 그전에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서로 싸우다 죽는 경우는 더 많았다. 새삼스럽게 죽음 따위. 어차피 풍요로운 시절에도 사람들은 죽었다. 나이가 많아서 죽고 병들어 죽고 사고로 죽고. 그런데 먼저 죽어 없어질 어른들이 왜 이제 와서 오염 따위에 연연할까. 어차피 우리가 살 세상인데,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작가 소개   
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소설창작학과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나무젓가락」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제2회 EBS 라디오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단편소설집 『붉은 나무젓가락』, 장편소설 『수목원』,
그림동화 『옥상에 텃밭이 생겼어요』
옴니버스 에세이집『가족이 힘이다』『수업』『가족, 당신이 고맙습니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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