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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의 지성과 산책] "나를 지탱해준 힘은 '고통 체험'… 교과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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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퇴임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2003년 퇴임 이후 14년 동안 2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과거, 출세의 사다리(전4권)』 『한국선비지성사』 『조선왕조의궤』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 『다시 찾는 우리역사(전면 개정판)』 등 본격 역사서들이다. 한영우(80)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얘기다. 『다시 찾는 우리역사』는 가장 많이 읽히는 한국사 통사로, 영어ㆍ중국어ㆍ일어ㆍ러시아어로도 번역됐다. 『율곡 이이 평전』 『우계 성혼 평전』 『꿈과 반역의 실학자 유수원』 『조선 수성기 제갈량 양성지』 『나라에 사람이 있구나-월탄 한효순 이야기』 같은 인물 평전도 정년 후에 계속 펴내고 있다.

한영우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는 올해 우리 나이로 80세를 맞는 원로이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3년 정년 퇴임 이후 14년 동안 본격 역사서를 20여권 펴냈다. 지난해에만 3권을 냈고 조만간 또 다른 신간 『정조 평전』(가제)도 나올 예정이다. 매일 개인연구실에 오전 9시 출근하면서 어느 현역보다 더 현역 같은 일상을 반복하게 하는 힘은 30대 초반에 겪은 '고통의 체험'이었다. 신인섭 기자

“내가 골프를 치나 술을 마시나…, 할 일이 없어서 그래요.” 이렇게 말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관악구 낙성대 부근 개인연구실을 매일 오전 9시 출근해 오후 4시30분 퇴근하며 현역보다 더 현역 같은 일상을 반복하게 하는 힘은 뭘까. ‘고통의 체험’이었다. 30대 초반 서울대 전임강사 시절 겪은 고통이 그를 한눈 안 팔고 ‘학자의 길’을 걷도록 채찍질했다. 권력과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외롭게 했다고 한다. 전두환 정부 이래 역대 정권에서 각종 관직 제안이 있었지만 국사편찬위원장직을 비롯한 모든 제안을 단번에 뿌리쳤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최근 평전 작업을 계속 해오고 있는데 다음 차례는 누굽니까.
“거의 원고가 끝나가는데 『정조 평전』(가제)이 곧 나옵니다. 정조와 사도세자와 영조, 이 세 사람의 인과관계를 따져야 정조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도 괜찮은 인물이었는데, 정조가 너무 똑똑하니까 영조가 후계구도를 바꾼 거죠. 역사연구를 할 때 인물의 캐릭터(성격) 연구가 중요합니다. 타고난 캐릭터와 성장과정을 거치며 한 인간이 형성되죠. 표피에 드러난 업적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인간 내면에 대한 연구는 잘 안 되고 있는 실정이죠.”
평전을 계속 출간하고 있는 것도 인간 내면을 입체적으로 탐구하려는 작업이군요.
“공부 스타일에 두 가지가 있어요. 머리로 공부하는 사람과 가슴으로 공부하는 사람. 예컨대 정도전과 정몽주를 볼까요. 같은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인데 왜 정몽주는 혁명을 반대했고 정도전은 혁명가가 되었을까요. 정몽주는 머리로 배웠고, 정도전은 가슴으로 배웠습니다. 정몽주처럼 부유한 집안 출신은 가슴으로 잘 안 배우게 되죠. 아쉬운 게 없기 때문입니다.”
『율곡 이이 평전』도 펴냈는데 율곡은 어떤가요.
“율곡이 머리만 좋아서 대학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19살 때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가 1년 뒤 환속하죠.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 유생들이 율곡을 옆에 앉지도 못하게 했어요. 출가했었다고 왕따를 당한 거죠. 이 때문에 그는 홍문관 벼슬을 제수받았을 때 자신은 자격이 없다며 고사를 합니다. 스스로 죽을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성인이 되어갔습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양성지(梁誠之)와 실학의 선구자인 유수원(柳壽垣) 평전도 썼는데, 양성지의 호는 눌재(訥齋), 유수원의 호는 농암(聾庵)입니다. 말더듬이, 귀먹어리라는 뜻이죠. 이들은 임금과 직접 대화를 못하니 상소와 필담으로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 상소가 쌓여 거대한 문집으로 전해집니다.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이 위대한 일을 해내곤 하죠.”

한 교수의 일생을 좌우한 아픔은 30대 초반에 찾아왔다. 서울대 전임강사가 되며 남부러울 게 없던 시절이다. 스승 한우근 전 서울대 교수의 권유로 국정교과서 제작(조선시대 담당)에 참여한 것이 발단이었다. 요즘과 달리 그 당시 국정교과서는 원로 국사학자들의 합의에 의해 진행된 사업이었다고 한다.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우리의 연구가 아직 많이 축적되지 않아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왜곡을 걸러내기 어려우니 그걸 방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년 넘게 준비해온 국정교과서가 출판될 때는 유신헌법이 통과된 직후였어요. 유신 이야기가 반쪽 분량 정도 들어갈 수밖에 없었죠. 때문에 유신 교과서라는 비판을 받았고 나는 어용교수로 몰렸습니다.”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학계에서 왕따를 당하고 난타를 당하니까 한때 학계를 떠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걸 극복한 게 공부였습니다. 율곡 평전을 쓰면서 그때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지, 내가 살려면 내가 학문을 더 해서 큰 학자가 되는 길 밖에는 없다, 그런 마음이 지금도 있습니다.”
한국사 서술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둬야합니다. 역사가와 이데올로기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관계입니다. 너무 멀리하면 아무 이념도 없고 가치관이 빠진 역사가 되죠. 너무 가까이하면 이미 결론이 나와 있게 되죠. 이데올로기 사학은 역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극단적 민족주의, 유물사관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할까요.
“역사학자도 사람이니까 어느 정도 이데올로기를 가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거리를 둬야합니다. 나 역시 몰가치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치에 매어서 살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치에는 거리를 둡니다. 너무 실천 쪽에 참여하면 나도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데올로기 없이 실천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 학자로서 끝난 것입니다. 그래야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죠. 몰입하면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죠. 그러면 정치인이지 학자가 아닙니다. 내가 시간이 많다는 것도 내가 의도적으로 나를 외롭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신조를 지키기 위해. 학자들은 이런저런 러브콜을 많이 받는데 거리를 두고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근 한국사 국정교과서 최종본이 공개됐는데 어떻게 보셨나요.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대한민국 수립’이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그것만 가지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건국이나 정부수립이나 다 똑같은 말 아닌가요, 대한민국 수립 없이 정부수립이 가능한가요, 나라 없이 정부수립이 가능하냐는 말입니다. 이거는 말장난이에요. 수립이나 건국이나 뭐가 달라요. 사실은 그 위가 더 중요해요.”
그 위가 뭔가요.
“조선시대의 국가이념을 ‘농본주의’라고 해놓았더군요. 그럼 고려나 신라는 농본주의가 아니고 조선만 농본주의인가요? 또 대한제국 때 광무개혁을 실시했다고 해놓고는 복고적이고 민권탄압을 했다고 써놨더군요. 그러면 광무개혁은 나쁘다는 뜻이지요. 대한제국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많이 축적되어 있는데 그런 점이 별로 반영이 안 되었어요. 대한제국을 어떻게 보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조선과 대한제국을 깎아내리면 그것을 멸망시킨 일제시대가 밝아지게 되죠. 그래서 일본이 근대화를 했다는 식으로 연결됩니다. 대한민국 발전도 일제가 근대화의 기초를 놓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앞 시대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이 어떻게 연결되나요.
“대한제국이 곧 대한민국입니다.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는 제국이지만, 목표는 ‘민국’(民國)이었습니다. 그것이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어진 것이죠. ‘민국’이란 표현도 ‘민주공화국’의 줄임말이 아니고 이미 영정조시대 이후로 유행했습니다. 민국이란 용어가 민주공화국의 약자로 갑자기 만들어진 용어가 아니라는 얘깁니다. 백성의 나라로 가자는 의미가 담겼어요. 그런 전통 때문에 상해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한 것입니다. 영ㆍ정조 이후 300년 전부터 뜸들여온 용어란 것이죠. 대한이란 용어도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삼한 곧, 삼국의 영토를 모두 아우르는 대국으로 비약하자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대한제국 때 독도가 영토로 확고하게 편입되고, 만주로 진출하는 정책이 추진된 것입니다. 삼일운동의 구호가 대한독립만세인 이유죠.”
대한제국이 왜 멸망했나요, 고종과 명성황후가 개혁을 잘 못해서 일본에 패한 것 아닌가요.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해선 일제가 만들어 놓은 너무 안 좋은 선입관들이 우리 사회에 이미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산업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이뤄지죠. 우리도 19세기 초에 그런 흐름을 탔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세도정치에 일차적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고종이 근대화 정책을 펼쳤고 상당히 성과를 냈지만 일본의 속도와 야욕을 못 따라갔습니다. 출발이 너무 늦었습니다.”
황태연 동국대 정외과 교수도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대한제국의 의미 등을 각종 저술을 하며 강조하고 있는데 두 분 중 누가 먼저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그런 자료들이 너무 많습니다. 공부를 안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황태연 교수와 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기 공부를 계속 하다 보니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죠.”
국정교과서 논란을 풀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완전히 이념 대 이념의 논란이 됐어요. 진실은 가려져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한국사 학자를 전부 좌파로 보는 것은 문제입니다. 이념으로 다 색칠을 해버리니까 좌파 아니면 극우파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좌파로 보이나요?”
그렇게 안보입니다만…, 검인정과 국정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자유국가에서 여러 종교를 합쳐서 하나의 교리를 만들어놓으면 따라 오겠습니까. 종교를 통일하는 것과 똑같아요. 역사의식의 통일은 자유주의국가에서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역사책을 보면서 이거 내 생각과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의 자유를 막을 순 없어요. 그런데 이걸 하나의 바이블로 만들면 후유증이 큽니다. 논란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견해를 동등하게 소개하거나 결론을 피하면 더욱 혼란이 옵니다. 예를 들어 고조선의 첫 수도를 아사달로 적고, 그 위치는 본론에 없고, 각주에서 여러 견해를 실었습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아사달의 위치를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입니까?”
검인정으로 가야한다는 얘기지요.
“국정과 검인정을 놓고 선택하라면 우선 검인정으로 가야합니다. 다만 정부가 손 놓고 있지 말고 지침서를 잘 만들어 그 지침서를 따라오는 사람만 쓰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전혀 엉뚱한 역사책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다양성을 띄고. 국정은 또 국제적으로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논란이 되는 고대사 부분, 일본의 역사왜곡과 관련된 근현대사 등 민감한 부분을 생각해 봅시다. 국정이 되면 국가가 피해갈 방법이 없어요. 외교적 마찰에 대해 정부가 모든 책임을 져야합니다. 변명할 구실이 없어요. 검인정은 학자들이 그렇게 썼다고 할 수 있잖아요. 가이드라인을 주되 개인이 자유롭게 썼으면 국가는 부담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좋은 교과서’의 조건은 뭐라고 보십니까.
“책을 많은 사람이 함께 쓰면 더 좋아질 것 같죠, 그렇지 않아요. 여러 색깔이 뒤섞인 조각보가 되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갑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집필하면 역사의 체계가 무너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왕조가 바뀌면서 발전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정확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스토리, 즉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역사의 방향감각을 잃게 됩니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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