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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의 맛집] 팟타이, 얼큰한 똠양누들…소주와도 환상 조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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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 디자이너 김석원의 ‘까올리 포차나’

‘한국 식당’이란 뜻의 태국 식당
가게 복판 아이스박스서 술 꺼내줘
촌스럽고 독특하고···방콕 온 듯

얼큰한 똠양누들.

얼큰한 똠양누들.

이태원 경리단길이 지금처럼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사랑받기 전, 그 곳은 우리처럼 술과 사람 그리고 이야기를 즐기는 주당들에게는 더 없이 완벽하게 비밀스러운 동네였다. 좁은 골목 주택가 사이에 조용히 자리 잡은 작은 술집들을 저녁 내내 옮겨 다니며 마시다 보면 우연히 만나는 지인이나 친구 혹은 동생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그들과 자연스레 합석해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는 게 나는 정말 좋았다.

모든 술꾼들이 그러하듯 마무리 자리에선 늘 개운한 음식이나 탄수화물, 얼큰한 국물이 생각난다. 우리도 그랬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항상 그런 음식들을 주로 하는 식당으로 취한 발걸음을 옮기면서 마무리되곤 했다.

흰색의 커다란 간판에 태국어와 함께 영어로 쓰여진 참 묘하고 재미난 상호명의 ‘까올리 포차나 (Kkaolli pochana)’ 외부 모습.

흰색의 커다란 간판에 태국어와 함께 영어로 쓰여진 참 묘하고 재미난 상호명의 ‘까올리 포차나 (Kkaolli pochana)’ 외부 모습.

하루는 후배 녀석이 ‘정말 괜찮은 태국음식점을 찾았다’며 우리 일행을 이끌고 경리단길 옆 재래시장으로 들어섰다. 늦은 밤, 좁은 골목길에는 고만고만한 크기의 작은 간판들이 즐비했지만 영업을 끝낸 터라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골목 반대편 끝에 다다르니 묘한 느낌의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여기가 방콕 시내 뒷골목인가 싶었다. 흰색의 커다란 간판에는 이국적인 태국어와 함께 영어 ‘까올리 포차나(Kkaolli pochana)’라고 쓰여 있었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한국 식당’이란다. 한국에서 태국음식을 파는 한국식당? 참 묘하고 재미난 상호명이다.

태국어와 영어를 나란히 써놓은 까올리 포차나의 간판.

태국어와 영어를 나란히 써놓은 까올리 포차나의 간판.

실내에 들어서면 방콕에 온 듯한 느낌은 더 커진다. 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카오산 로드 어디쯤에 있는 로컬 식당에 들어온 것 같다. 벽에는 태국 국왕의 사진 액자들을 중심으로 각종 태국 관련 이미지와 키치한 광고 포스터들이 가득하다. 실내는 알루미늄 테이블과 의자를 비롯해 핑크색 플라스틱 그릇, 시큼한 기본 소스들까지 방콕의 노천 식당들에서 보았던 그것들과 똑같은 것들로 세팅돼 있다. 한 번이라도 방콕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그 익숙하고 편안한 촌스러움에 다시 방콕여행을 온 듯 착각할 법 하다.

맥주를 한가득 담은 아이스박스.

맥주를 한가득 담은 아이스박스.

고작 테이블이 6개뿐인 실내 한가운데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아이스박스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 집의 각종 술과 음료수는 냉장고 대신 바로 이 아이스박스에 담겨 있는데 제법 차갑다. 태국 거리 뜨거운 태양볕 아래 놓인 아이스박스와는 성능(?)이 틀리니 시원한 맥주 맛은 걱정할 필요 없다. 벽 대신 통유리로 마감된 오픈주방은 건물 밖에서도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센 불에 볶아대는 식재료 향과 태국 고추·향신료들로 식욕을 자극한다. 적당히 술에 취한 주당들이라도 이 향을 맡으면 머릿속은 지금까지 먹고 마셨던 술과 음식들을 다 지우고 안 먹고 안 마신 척, 그러니까 몹시 배가 고픈 상태로 다시 리셋된다.

솔직히 다른 식당이라면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부분도 있다. A4 용지에 손 글씨로 써서 프린트한 메뉴들은 식당 한구석 문짝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등받이도 없는 불편한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 사이를 빠져나가기도 벅찬 좁은 공간, 약간은 두서없이 받는 주문과 순서 없이 나오는 음식들. 하지만 어쩐지 손님들의 표정에서 불편함은 찾을 수 없다. 왠지 이 식당에서 만큼은 그 초라하고 불편한 서비스가 용서되는 분위기다.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당연하듯 받아들이고 즐기는 모습들이다. 역시 이제는 식당도 단지 맛있는 음식을 넘어, 문화와 경험을 함께 넣어 요리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이 들었다.

(문짝에 붙은)메뉴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시키고 싶은 것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늦은 밤, 우리는 식사보다는 술과 안주가 필요했다. 아이스박스에 가득한 건 태국 맥주 창·싱하·레오였지만 우린 국산 소주와 그에 잘 맞는 안주거리를 고민했다. 결국 땅콩 가루가 가득 뿌려진 달달한 ‘팟타이’와 똠양꿍 수프에 쌀국수를 추가한 ‘똠양누들’을 주문했다.

새우와 함께 잘 볶아진 팟타이는 숙주나물과 함께 한입에 다양한 식감을 느끼게 해주는 메뉴였다. 입안을 맴도는 소스의 달달함, 땅콩의 고소함에 소주 한 잔을 더했을 때 느껴지는 독특한 끝 맛은 우리를 즐겁게 했다. 소주의 소울메이트인 한국적 얼큰함 대신, 똠양꿍 이라는 태국 전통 수프에서 전해져 오는 다양한 풍미와 얼큰함 또한 꽤 새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수프 속에 숨어 있는 쌀국수를 찾아 그릇 바닥이 보일 때까지 도저히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 곳에서 또 다시 오랜 시간 국산 소주와 태국 음식의 완벽한 조화로움에 만족하며 아주 기분 좋게 자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물론 다음날 숙취는 평소보다 더 심하긴 했다.

까올리 포차나

● 주소: 용산구 이태원동 706(녹사평대로54길 11)
● 전화번호: 070-8872-1995
● 영업시간: 월요일 휴무. 화~금 오후 6시~새벽 1시. 토 오후 4시~새벽 2시. 일 오후 1시~자정
● 주차: 불가
● 메뉴: 새우·쇠고기 팟타이 1만2000원, 똠양꿍 1만8000원(면 추가 1000원), 탈레팟 퐁가리 2만5000원
●드링크: 태국 맥주 창·레오 5000원, 싱하 7000원. 국산 소주 4000원

이주의 식객

김석원 패션 디자이너. 아내 윤원정과 함께 브랜드 ‘앤디 앤 뎁(ANDY & DEBB)’을 18년째 이끌고 있다. 언제나 포마드를 이용한 2:8 헤어스타일을 고집하는 젠틀맨. 업계에선 오래된 자타공인 미식가. TV 맛프로 ‘수요 미식회’에도 가끔 얼굴을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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